우리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일들이 있는가 하면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미덕을 베풀어야 하는 일도 있다. 사회상규상 우리가 최소한의 도리를 규정하고 성문화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법이다.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며 상대에게 배려하고 서로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행동 규칙을 정한 것이다. 법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도리라 한다. 도리는 임금과 신하가 지켜야 할 도리, 부모와 자식 간에 지켜야 할 도리, 형제간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인륜이란 가정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형성되는 대인관계에서 지켜야 할 질서이며 천륜은 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임의로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다. 가끔은 언론이나 방송에서 인륜과 천륜을 저버리는 일들이 있다는 내용을 접하곤 하는데 화재 현장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많은 화재 현장에서 규명되는 원인은 때론 슬픔을 주기도, 기쁨을 주기도 한다. 어떨 땐 얼굴을 붉히고 사회상규상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원인이 규명되기도 한다.
신고자인 A 씨는 자신의 주택에서 식사하던 중 밖에서 ‘펑’하고 무언가 터지는 굉음을 들었다. 놀라 창문을 열고 확인해 보니 맞은편 건물에서 불꽃이 분출하는 걸 보고 119에 신고했다.
화재 발생 전 상황에 주목하라! 화재지점 주택에는 모녀 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화재 당시 어머니는 거실에 있는 화장실 겸 샤워장에서 샤워 중이었고 딸은 자기 방에서 “그냥 쉬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화재는 어떻게 알게 됐냐는 질문에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는데 펑 소리가 나 방문 밖을 확인하니 거실 화장실 앞에서 화염이 보이고 검은 연기가 나 집 밖으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거실 화장실에서 샤워 중이었는데 화재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혼자 대피했다? 살짝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당황했으니 화재 현장을 벗어나려고 하는 탈출 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못 할 수도 있었겠지…
현장에서 탈출한 사람의 외모를 살펴라! 주택에서 쉬다가 화재를 인지하고 밖으로 대피한 딸이 울면서 “집에 엄마가 아직 나오지 못했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친다. 엄마가 어디 있냐는 물음에 “엄마는 집 안에 있었는데 나오지 못했어요”라고 한다. 화재진압대가 진입할 당시 어머니는 샤워하다 탈출한 듯 알몸인 상태로 현관에 엎드려 가냘프게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딸의 외모를 살펴본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특이점이 전혀 없었다. 다만 급하게 탈출한 듯한 모습 그 자체였다. 신발도 못 신고 뛰어 탈출했고 밖에 주저앉아 발버둥 치며 “엄마, 엄마, 엄마를 구해주세요”하고 반복해 외쳤다. 보통 화재 현장에서 탈출한 사람 몸에는 탄화한 내음이나 매캐한 냄새가 풍겨야 함에도 전혀 나지 않았다. 화재를 인지하고 바로 탈출했다는 진술과 일치한다.
요구조자를 우선 이송하라! 요구조자는 현관 앞에 엎드린 자세로 있어 선착대에서 구조했다. 요구조자를 인계받은 관할 구급대에서는 산소를 투여하며 바로 병원으로 이송 조치했다. 요구조자인 어머니는 구급차 안에서 한마디도 못 한 채 의식을 잃은 상태로 호흡만 하고 있었다. 언어지시에도 반응이 없었으며 통증 자극에서 일부 반응했다고 한다. 결과론적이지만 말씀을 아끼시는 건지 아니면 화재 현장 유독가스 흡입으로 언어지시에 반응이 없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하던 중 나흘째 사망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자 화재 현장을 조사하는 조사관으로서도 무척 힘든 일이다. 업무적인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심적으로 힘들다. 사망자가 발생하면 남 일 같지 않고 사연이 밝혀지면 더욱더 마음이 무겁다. 특히 조사관은 현장에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더 나아가 사망 원인이 화재인지, 사망 후 범죄 은폐인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화재를 살펴라! 화재는 4층 건물 3층에서 발생했다. 3층은 주택으로 사용 중이었다. 화재지점에 잔류한 물리적 증거로 전선에서 합선(合線) 흔적이 관찰됐으나 합선이 화재 원인이라고 단정 짓기엔 현장에 석연치 않은 연소 패턴이 잔류했다. 분열 흔적이 관찰된 부분에는 발화요인이 없었고 전기합선 흔적은 분열 흔적 중심부가 아니라 측면에서 발굴ㆍ관찰됐다. 전선이 발굴된 측면 소파에 잔류한 연소 패턴은 합선 흔적이 발화요인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얇고 넓게 탄화한 형태와 발화지점이 산발적으로 살펴지기도 했다. 현장 물리적 증거는 ‘전기적 요인’, 정황적 증거는 ‘방화’ 희비가 엇갈리는 현장이었다. 연소 형태는 산발적이고 화재 요인은 물리적 증거와 정황적 증거로 갈려 있었다.
방화 가능성을 생각하라! 딸이 어머니 심부름으로 집 근처 페인트 판매점에서 시너 2통을 사 온 게 확인됐다. 그러나 사실상 어머니가 사 오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출입구에 시너 빈 통이 발견됐으나 내용물은 전혀 없었다. 시너를 산 내용만으로 방화 가능성을 논한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 뚜껑이 없는 상태로 내용물도 없다는 건 사용했거나 불을 놓아 연소 촉진제로 사용했을 수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게 방화 사건이라면 자식이 부모를 해하기 위해 방화한,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 된다.
만약 방화가 아니라면 괜한 의심으로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따가운 시선에서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방화의 경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현장에 잔류한 증거는 전선에 나타난 단락 흔적이 유일했다. 만약 시너를 뿌렸다면 진압수 위에 무지개처럼 레인보우 패턴(Rainbow Pattern)이 식별돼야 함에도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현장에 전기적 요인이 잔류한다고 해서 모두 전기적 요인의 화재는 아니다. 전선이 노후하거나 단락이 있던 지점에서 분열된 연소 패턴이 관찰되고 주변에 잔류한 증거가 없을 때 비로소 전기적 요인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화재 현장에서는 전기적 요인이 석연치 않게 관찰돼 화재 원인으로 규명하기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사진 4] 멀티 코드 부분에서 [사진 3]의 단락 흔적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만약 [사진 3]의 단락 흔적이 화재 원인이라면 [사진 4]의 소파 목재나 상단에 소파 구성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단락 흔적이 관찰된 부분에서 발화해 주택 거실이 전소했다면 멀티 코드가 위치한 부분의 탄화심도가 깊고 주변으로 분열 흔적이 관찰돼야 함에도 분열 흔적보다는 상단에서 연소하며 가연물 일부가 흘러내린 듯한 형상이 관찰됐기 때문이다. [사진 3]과 같이 단락 흔적이 관찰됐다면 화재 실에 설치된 차단기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단락 흔적인지, 화염에 의해 용융된 흔적인지, 확인을 위해서라도 차단기를 확인해야 한다.
목격자 진술과 현장을 비교하라! A 조사관 : 주임님, 여기 딸이 시너를 2통 사 왔다는데 확인하니 3통이랍니다. 주임 : 그런데 왜? 2통이라고 거짓말을 했을까? 설마… A 조사관 : 거실에 많은 소훼 현상이 나타나 있어요. 다른 부분들은 위에서 아래로 하방 연소한 흔적이 관찰됩니다. 주임 : 그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게 발화부가 두 군데로 보이는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게 있네! A 조사관 : 딸의 진술은 거실에서 불꽃이 있었다고 했어요. 주임 : 맞아. 거실에서 불꽃이 있었던 건 맞는데… 과연 점화원이 뭘까? 차근차근 한번 보세나. 일단 신고자가 말 한 ‘펑’ 소리가 무엇인지부터 한번 찾아보세나. A 조사관 : 주임님, 이것 아닐까요?
의문점을 하나씩 풀어나가라! 현장의 의문점은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모든 화재 현장에 의문점이 잔류하지만 하나씩 풀어나가야 최대한 실체적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 현장에서 첫 번째 의문점은 딸이 화재를 인지한 후 신발도 신지 않고 탈출했는데 그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만약 화재를 늦게 인지한 이유가 방에서 문을 닫고 있었던 거라면 가능하다.
처음부터 다시 현장을 살펴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현장에 잔류한 증거는 전기합선 흔적이고 연소 패턴은 방화의 흔적이 살짝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연소 패턴을 관찰하라!
소파 앞 연소 형태와 달리 식탁 위 탄화형태가 심하게 관찰됐다. 장판은 모두 소실됐고 식당 의자 등받이에는 마치 하방 연소한 형태처럼 변색 흔적이 식별됐다. 현장에서 의문점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A 조사관 : 주임님, 시너 뚜껑이 딸아이 방 책상 위에서 발견됐어요. 주임 : 그래? 왜? 거기 있을까? 어머니가 시켰나? 어머니는 샤워 중이었는데… A 조사관 : 이상해요. 시너통 뚜껑은 딸아이 방에서, 빈 통은 현관문 앞에서 각각 발견됐어요. 주임 : 방화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시너를 이용해 불을 놓았다면 딸 몸에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전혀 없었거든. 코 밑에 약간의 그을린 형태 외 다른 부분에서 전혀 관찰되지 않았어…. 의심은 가는데 맨발로, 주저앉아 울며불며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했는데… B 조사관 : 현장 감식하셨어요? 어떻게 보셨어요? 주임 : 예. 현장에 잔류한 물적 증거는 전기합선이고 연소 패턴이나 정황은 방화인데 도무지… 방화 혐의는 수사에서 드러나야 할 것 같네요.
참 이상하다. 딸은 화재를 늦게 인지했고 화장실에서 샤워 중인 어머니는 따뜻한 물로 인해 수증기가 있는 상태에서 비누나 세정제를 사용하면서 향기 때문에 연기 냄새를 못 맡아 늦었다고 한다면… 딸은 ‘펑’ 소리를 듣고 나갔다는 건데 파열된 부탄통은 식탁 위에 있었다. 최초 화염을 봤다고 진술한 부분은 소파 앞 전동안마기가 위치한 지점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딸이 불꽃을 봤다고 진술한 지점에 전기합선 흔적이 잔류했다는 것이다. 딸의 진술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용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패턴들이 존재하고 머리가 복잡해지는 부분이었다.
화재 현장을 다시 찾았다
사흘이 지난 뒤 바닥에 잔류한 변색 흔적을 확인했다. 거실 중앙에 장판이 소실된 부분이 회색빛으로 변색해 있었다. 화재 당일에는 진압 주수에 의해 현장의 윤곽이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진압수가 배출되고 일부 건조한 상태에서 현장을 살펴보니 거실 중앙에서 분열한 흔적이 관찰된다.
화재지점에는 모녀가 살고 있었다. 화재 당시 어머니는 샤워 중이었고 딸은 작은 방에서 쉬고 있었다. 다만 어머니가 시너를 사 오라고 해서 딸이 시너를 사 온 사실은 확인됐고 1통을 사용했는데 빈 통은 현관에서 발견됐다는 점 외 방화로 추정할 만한 특이점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현장의 연소 패턴으로 보아 방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화재로 인해 수익 발생이 없고 딸이 불을 놓았다면 천륜을 거슬리는 일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과연 화재 원인은 무엇일까? 전기적 요인은? 주택 내부는 통전 중인 게 확인됐고 소파 앞 전선에서 합선 흔적이 관찰됐으며 불꽃을 목격한 딸의 진술과 목격지점이 일치하는 점으로 볼 때 전기적 요인을 배제할 수 없었다.
기계적 요인?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전동안마기가 설치돼 있었으나 특이점이 없어 전기적 요인은 배제했다.
가스누출에 의한 발화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판단했다. 가스레인지 위 조리기구 하단에 탄화 흔적이나 그을린 흔적이 관찰되지 않고 상단만 그을린 형태로 관찰됐기 때문이다.
가스레인지 형태로 보아 가스누출은 화재 원인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부주의 가능성은 거실 내부에서 미소화원이나 발열 기기가 관찰되지 않았으며 현장에 잔류한 현상만으로는 부주의 가능성을 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 현장 화재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석연치 않은 물적 증거와 잔류한 연소 패턴으로 분석하건대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 사건 현장은 불을 놓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물적 증거가 없었고 정황도 조작될 수 있어 원인을 특정하기에 부족해 종결된 원인은 ‘미상’이었다. 사실 시간이 지나고 밝혀진 일이지만 이 사건은 천륜을 저버리는 사건이었고 불을 놓은 방법도 기상천외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경기 부천소방서_ 이종인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0년 5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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