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0일 한국소방산업기술원 세미나실에서 가스계소화설비 설계프로그램의 성능인증 기술기준과 시험세칙 개정안에 대한 제조업체 관계자 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 박준호 기자
|
[FPN 최영 기자] = 국내에서 사용되는 가스계소화설비의 신뢰성 논란이 끊이지 않자 소방청과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이 관련 기준 개정에 나섰다. 그간 제기된 논란을 잠식시키겠다는 취지지만 전 세계적으로도 없는 기준을 제시하자 업계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소방청(청장 정문호)과 한국소방산업기술원(원장 권순경, 이하 기술원)은 지난달 30일 용인에 위치한 기술원 세미나실에서 ‘가스계소화설비 설계프로그램’의 성능인증 기술기준과 시험세칙 개정안에 대한 제조업체 관계자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기술원과 소방청 관련 업무 담당자를 비롯해 국내 가스계소화설비 공급사 17개사가 참석했다. 이날 기술원은 자체적으로 마련한 개정안을 설명하고 업계에 의견을 물었다.
기술원이 제시한 개정안에는 설계매뉴얼과 설계프로그램, 프로그램의 적용성과 유효성 확인 사항, 소화약제 배관의 최대배관비 등 시험모델 개선, 시험설비 규격 개선 등 방대한 내용이 담겼다. 지금까지 모든 가스계소화설비에서 시험조차 없이 동일하게 50m까지 허용된 배관의 수직높이 시험을 실질적인 검증방안으로 변경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특히 설계프로그램의 유효성 확인을 위한 소화약제 방출시험 과정에서 기존 50A 하나만 시험하던 방식을 15~150A에 이르는 배관 호칭 구간별 세 가지 시험으로 변경하는 개정안을 제시했다.
가스계소화설비 실험 과정에서 이처럼 배관의 규격별로 실증실험하는 건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하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제기되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실증실험 체제로 전환하더라도 검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끝없는 논란이 생길 거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대표성을 가진 실험을 통해 성능을 확인한 뒤 시뮬레이션으로 시스템의 성능을 검증하는 가스계소화설비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걸 실증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기술원과 업계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가스계소화설비 인증은 대표성 시험을 거쳐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외국과 비교할 때 과도하게 긴 방출 거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술원이 실증 위주의 개정안을 마련한 것 역시 가스계소화설비의 성능상 제기되는 신뢰성 논란에서 벗어나겠다는 강한 의지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이날 회의에 참석한 기술원의 한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가스계소화설비 시험은 대표성 시험을 하고 이를 서로가 인정하면 되는데 기존 시험이 부족하다는 문제 제기가 확산되다 보니 이런 기준안이 나오게 된 것”이라며 “미국 UL도 이렇게 많은 시험을 하지 않고도 말이 없지만 우리나라 업계는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정안은 기술원 내부에서 깊은 고민을 해 마련한 내용”이라며 “이 방향과 다르더라도 제기되는 문제를 보완할 방법이 있다면 수용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개정 추진 자체를 두고 완강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A사 관계자는 “제시된 안은 UL이나 FM보다도 과하다”면서 “현재 모든 업체의 배관비가 높거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인증을 내줄 때 타당성을 검토하는 건 기술원임에도 이를 못 잡아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특정 업체의 문제이기에 행정조치를 취하기도 했던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B사 관계자는 “기준이 개정되더라도 기존 인증을 받은 걸 토대로 추가된 부분은 업그레이드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타당성 있게 가야 한다”며 “새로 갈아엎는 방향이 아니라 기준의 연속성을 가져가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C사는 “몇몇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그걸 해결해야지 1, 2년 뒤 전체 시스템이 못 쓰게 되는 건 안 된다”며 “지금 인증받은 프로그램은 재산과 인명을 지키기 위해 불을 끄는 데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내며 개정 자체를 반대하기도 했다.
D사 관계자는 “일반 소화기 같은 건 비용도 시간적으로 무리가 없으니 기준 개정을 탄력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가스계소화설비는 적게는 20억에서 60억까지도 비용이 발생한다”며 “이걸 모두 다시 받기 위해 추진해야 하는 것은 무리고 유예기간 1년의 경우에도 기술원이 현재 승인받은 설비 70개를 처리할 수 있는 인력이나 환경도 안 된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제시된 개정안에 대한 의견보다는 기준 개정 자체를 반대하며 현재 시스템의 무용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만 커지면서 진척되지 못했다. 결국 기술원은 업계에게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차후 재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이날 열린 회의에서 기술원 측은 기준 개정을 추진하는 불가피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임광규 기술사업이사는 “소방에는 가스계소화설비를 제조하는 분야 외에도 시공과 유지관리 등 다양한 분야가 있고 기술원 입장에선 이 세 분야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며 “지금 소방기술사 등의 기술자들이 상당수 가스소화설비가 불이 다 안 꺼진다고 얘기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서는 실증실험을 안 하는 최대 배관 길이와 높이 등에 대해 주장하면서 기술원은 설계와 감리 등 분야 관계자들로부터 지속해서 지탄을 받고 있다”며 “이러한 문제 제기 부분에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고민해서 마련한 개정안”이라고 강조했다.
최영 기자 young@fpn11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