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그때마다 유행과 트렌드가 바뀌는 건 으레 자연스러운 이치다. 필자가 몸담은 소방이라는 조직 내에서도 그 이치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화재 현장에서 내부로 진입할 때나 화재를 진압할 때, 구조대상자를 구조할 때 등 계속해서 새로운 기법이 개발ㆍ적용되고 있다. 수중 구조 분야도 마찬가지다.
테크니컬 다이빙이 소방에도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정밀 중성부력이나 트림 자세, 장비 배열 등 이전보다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분명 좋은 변화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유행이나 트렌드에 편승하는 건 걱정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트림 자세가 많은 예 중 하나다. 트림 자세가 다이빙의 능숙함에 대한 기준이 돼버린 것 같은 요즘은 마치 스쿠버 다이빙의 전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쓴소리로 시작했지만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넓은 시야를 갖길 바라는 선배의 마음으로 이번 호를 써 내려간다.
국민에게 아픈 손가락으로 남은 천안함 사건에서 필자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아직도 정치적 화두로 언급되는 민감한 주제지만 필자는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구조대원으로서의 얘기만 하겠다.
“2010년 3월 28일 백령도 현장에 투입되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경계 임무 수행 중이던 해군 소속 천안함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됐다. 사고 사흘 뒤 현재 소방청의 전신인 소방방재청에서는 구조대를 긴급 편성해 사고 현장으로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필자를 포함한 중앙구조단 소속 긴급기동팀 대원들과 서울, 경기, 인천에 근무 중인 대심도 잠수가 가능한 직원들이 함께 소집됐다.
필자는 선발대로 편성, 헬기를 이용해 현장에 투입됐는데 이동하면서 작은 걱정이 있었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軍)’이라는 조직 특성과 함께 사고 현장인 바다는 우리 소방의 관할이 아니기에 우리의 구조 활동이 그곳에서 제약을 받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우리가 현지에 도착해 ‘광양함’이라는 구조함에 몸을 실었을 때 우릴 바라보는 해군들의 시선을 잊을 수 없다. ‘왜 소방이 여기를 와? 성가시게’, ‘얼마나 잠수를 잘하는지 보자’ 등 무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의 임시 대기실도 한몫했다. 번듯한 작전실이나 사관실, 부사관실도 아닌 배 갑판 밑 사병실로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대장님을 포함한 우리 기동팀은 무시 아닌 무시를 받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현장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모 구조연합회에서 구조 잠수를 하러 왔다가 입수하자마자 조류에 떠밀려 작전도 하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걸 해군들이 오히려 구조해줬다는 내용도 있었다. 인증되지 않은 소방의 잠수와 구조 실력에 의구심을 내비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필자도 당시엔 ‘우리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파견된 탓에 장비와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색할 곳은 수심이 45m로 더블 탱크를 써야 했다.
선발대로 함께 온 서울 직원들은 경험이 없어 보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시 잠수를 할 수 있는 인원은 필자를 포함해 두 명이 전부였다.
장비 또한 문제였다. 현장에 투입될 당시 이용한 헬기가 작아 더블 탱크를 준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군에게 빌려 써야 했는데 그 더블 탱크는 군에서 사용하는 거라 플라스틱 백판(backplate)이 부착돼 있었다.
필자는 해군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던 장비이긴 했지만 우린 정확한 부력조절을 위해 그걸 제거하고 준비한 부력조절기를 장착했다.
게다가 더블용 호흡기도 준비 되지 않아 싱글용을 현장에서 개조했고 수중랜턴도 현장에 맞게 선택했다. 밝기 자체로만 본다면 당시에 보유한 HID라이트를 썼겠지만 부유물이 많은 서해 특성상 투과율이 좋은 할로겐 라이트를 사용했다.
기체도 문제였다. 트라이믹스(헬륨+산소+질소) 기체를 구할 수가 없어 공기를 사용했고 그에 맞는 다이빙계획을 세웠다.
차가운 수온에 맞게 슈트는 당연히 드라이 슈트를 택했지만 당시 해군은 습식 슈트를 착용했다. 인원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현장 상황에 맞게 변형하고 조합하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나갔다.
24시간 중 간조와 만조 사이에 물이 멈추는 ‘정조’ 시간은 네 번이다. 잠수는 한 번에 한 시간 정도밖에 할 수 없다. 소방은 해난구조대 한 팀과 낮 시간대에 같이 입수하기로 했다. 소방이 맡은 임무는 하강 라인을 따라 잠수해서 천안함의 식당 칸으로 진입ㆍ수색하는 거였다.
천안함이 옆으로 눕혀져 있어 식당 칸에 진입하려면 위에서 밑으로 들어가야 할 거라는 사전 정보를 받았다. 정조 시간이 돼 필자가 속한 소방팀과 해군 한 팀이 입수 준비를 했다. 보트는 달랐지만 부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 서로 안전하게 수색을 끝내고 올라와서 보자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총 잠수시간은 감압시간을 포함해 35분. 처음 해군에게 35분 잠수한다고 했을 때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해군보다 잠수시간을 길게 계획했기 때문이다. 물때는 정조였지만 모 구조연합회처럼 조류에 떠내려갈지 모르기에 입수와 동시에 부표의 하강 라인을 잡아야 했다.
이런 다이빙은 서해에서 자주 해 봤기에 문제 되지 않았다. 하강해 천암함에 다다르니 시야는 생각한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하강 라인에 릴을 설치하고 식당 칸으로 진입하려는데 해군 잠수감독관이 얘기한 것과 달리 천안함은 90°로 누워있지 않았다.
그래서 식당 칸으로 진입하는 걸 멈추고 버디와 수중에서 좀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잠수시간은 흘러가고 상승 시간이 다가와 상승했다.
상승해보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우리 대장도 얼굴이 잔뜩 상기된 상태였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잠수하는 35분 동안 함께 입수했던 다른 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와 동시에 들어간 해난 구조팀은 급상승해 광양함 챔버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함수 부분을 수색하던 UDT 대원 세 명 중 한 명은 사망하고 두 명은 광양함에 와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니 다이빙 시간이 가장 길었던 우리 소방 팀에게 걱정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대장 또한 우리가 잘못된 줄 알고 잔뜩 긴장했었다고 한다.
필자도 UDT 출신이기에 광양함에서 본 두 명 다 낯이 익었는데 필자의 선후배였다. 그리고 거기서 돌아가신 분은 필자의 교관이었던 고 한주호 준위님이라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현장 상황 탓에 우리의 수색작업은 나쁘지 않았는데도 결코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해군 잠수감독관에게 우리가 수색했던 내용을 설명했다.
천안함은 누워있지 않고 비스듬히 서 있다는 걸 알렸지만 우리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날 다시 잠수를 허락해주면 수중카메라로 촬영을 해서 보여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날은 철수했다.
광양함에서 백령도로의 철수는 그리 쉽지 않았다. 우리가 입항하기로 한 백령도 항에 언론사 기자들이 잔뜩 나와 있었다. 그때 대장은 군이 작전하는 곳에서 소방이 언론에 노출되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해 반대편에 있는 항구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대장의 판단이 옳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몇몇 기자가 우리가 묵던 숙소까지 찾아왔지만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자칫 잘못하면 감당하지 못할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 필자는 적절한 언론 대응의 필요성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잠수… ‘소방이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이 됐다. 후발 대원들과 합류해 광양함으로 이동했는데 선발대에서 요구한 모든 장비가 다 도착해 있었다. 더블 탱크와 전용 부력조절기, 호흡기, 감압용으로 충전된 탱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중카메라에 라이트까지… 첫날에 부족했던 인원과 장비가 채워졌다. 이젠 임무를 완벽히 소화해내는 일만 남았다.
두 번째 임무는 천암함 외부 촬영이었다. 입수 전 수색용 릴(reel)에 감긴 줄을 교체했다. 사고 난 선체 특성상 날카로운 부분이 많아 기존의 얇은 나일론 줄은 끊어질 위험이 있었기에 3㎜ 로프로 교체했다. 릴은 필자가 운용하고 비디오 촬영은 버디가 하기로 했다.
수색을 진행하다 보니 ‘단정 안전수칙’이라는 글자가 정확히 우리 우측으로 보였다. 만약 선체가 90°로 누워있다면 이 글자는 우리의 아래 방향에서 보였을 거다.
수색하는 내내 어제 우리가 봤듯이 천안함 함미는 옆으로 눕지 않고 거의 똑바로 서 있다는 걸 확신했다. 이렇게 우리의 두 번째 잠수도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됐다.
처음에 우리에게 배정된 갑판 밑 사병실에서 해군 관계자들과 함께 촬영한 비디오 디브리핑(debriefing)이 열렸다. 그제야 해군 측에서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해군 중령계급의 구조대장은 대형 수송 헬기인 시누크 두 대를 중앙구조대에 보내 인원과 장비를 더 공수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대장의 자리도 사병실에서 갑판 위 작전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우리가 촬영한 비디오를 참고해 수색 작전 또한 재조정됐다. 두 번의 임무 수행으로 소방에 대한 해군의 편견이 싹 바뀐 듯했다.
촬영된 영상 시청이 끝나자마자 대장님의 지시하에 메모리카드를 해군에게 넘겼다. 혹여나 외부로 유출돼 언론에 노출되면 오히려 군에 누를 끼치는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린 사고 현장에 지원을 나왔고 그에 맞는 임무만 잘 수행하면 된다는 대장의 속 깊은 뜻도 함께했다. 해군도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그렇게 우린 또 언론의 눈을 피해 백령도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완전히 피할 순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했다. 역시나 우리가 의도한 내용보단 언론의 입맛에 맞게 전파를 탔다. 필자는 그때부터 언론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이 사건이 던져준 교훈 천안함 사건 현장에서 활동하며 느낀 점들을 정리해 보면 절대 수색에 있어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다. 수색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수색 대상이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시야를 넓혀 전체를 볼 힘을 길러야 한다. 트림 자세가 전부는 아니다. 다이빙 기술 중 하나일 뿐이다. 현장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시야를 넓혀라.
두 번째는 장비를 잘 알고 때론 응용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완벽한 장비가 준비된 현장은 드물다. 부족한 장비라도 그 장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현장에 맞게 응용해 적용하면 된다.
천안함 현장에서 싱글 탱크 장비를 더블 탱크로 전환해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이때는 무조건 이 장비를 써야 해’라는 생각은 현장에서 배제돼야 한다. 융통성을 길러라.
세 번째는 언론 대응이다. 소방에서도 많은 경험을 쌓으며 적절한 언론 대응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
모든 언론이 그렇진 않지만 순수한 우리의 마음과 달리 자극적인 요소로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언론이 있어 때론 우리에게 화살로 돌아오기도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언론을 통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건 맞지만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길 바란다.
10여 년 전의 사건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건 소방생활을 하면서 터닝포인트가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잠수에 대한 열정을 쏟지 않았나 할 정도로 말이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고 했다. 이 글을 읽는 소방대원들도 본인의 역량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필자의 무용담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많은 유능한 소방대원이 바로 앞만 보지 말고 먼 미래를 보고 준비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각자의 자리에서 정진하길.
독자들과 수난구조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사건ㆍ사례 위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자 한다. 만일 수난구조 방법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e-mail : sdvteam@naver.com facebook : facebook.com/chongmin.han로 연락하면 된다.
서울 중부소방서_ 한정민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2년 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