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이상하고 아름다운 불잡이들의 향연경북소방, ‘RITㆍ실화재 세미나’ 성황리에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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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서 돌아오라, 살아서 돌아오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6월 8일 오후. 경북소방학교 운동장은 제주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소방관으로 붐볐다.
“RIT 컴피티션 시범이 진행될 예정입니다”란 안내 방송에 방화복까지 갖춰 입은 소방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범이 진행되는 동안 소방관들의 집중력은 수험생 못지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더는 동료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관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실화재 훈련에 앞서 교관은 흰색과 주황색, 빨간색 등 알록달록한 술을 매단 ABC 랙에서 숏 펄싱, 롱 펄싱 등 시범을 보였다. 교관의 설명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운 소방관들로 발 디딜 틈이 없긴 이곳도 마찬가지다. 실제 불을 피운 훈련장 앞에 선 소방관들의 눈빛엔 비장함마저 묻어나왔다.
초여름인데도 30℃를 육박하는 이날 이곳에는 소방관들의 열기까지 더해져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런데도 방화복에 면체, 공기호흡기까지 20㎏가 넘는 장비를 둘러매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집중하는 교육생들. 그들을 보며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그런 그들의 열정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FPN/119플러스>는 경북소방학교에서 6월 8일부터 9일까지 이틀간 전국 최초로 개최한 ‘RITㆍ실화재 국내 학술세미나’를 찾았다. RITㆍ실화재 훈련 인식 개선과 확대 보급을 위해 마련된 이번 세미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이론 발표와 참여형 훈련으로 진행됐다.
발표에는 채해승 경북소방학교 소방장(한국형 RIT 교육 필요성)과 최기덕 경기 안산소방서 소방장(소방용 열화상카메라 교육의 필요성), 김하동 경북소방학교 소방장(RASP), 기영후 서울시119특수구조단 소방위(비상호흡법 적응성 검증)가 강사로 나섰다.
참여형 훈련은 미국 소방관 경연대회 시설을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개선한 ‘RIT 컴피티션’과 실제로 컨테이너 공간에 화재 상황을 구현해 화재 진행 단계와 함께 효과적인 진압 방법을 모색하는 ‘실화재 훈련’으로 이뤄졌다. 이상하고 아름다웠던 불잡이들의 향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신속히 동료를 구출하라”… 실제 상황 가정한 RIT 훈련
RIT(신속동료구조팀)는 현장 활동 중 위험에 처한 소방관을 구조하는 전문 팀이다. 현장 투입 소방관이 40초 이상 움직이지 않거나 사고를 당한 소방관이 도움을 요청하면 즉시 출동한다.
이 제도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미국방화협회(NFPA)는 RIT 역할 수행을 위한 교육 표준인 ‘NFPA 1407’을 제정했다. 이후 미국 소방관서에서 이 표준을 기반으로 표준작전절차(SOP)를 만들거나 RIT 임무 수행 시 참고하면서 활용했다.
우리나라에선 2008년 경기소방재난본부가 처음 RIT를 운영하면서 도입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해마다 끊이지 않는 소방관 순직사고를 계기로 RIT에 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미국 소방관 경연대회 시설을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개선한 ‘RIT 컴피티션’과 사다리 설치 전 개구부에 오래 버틸 수 있는 기술인 ‘원도우 윙’ 등으로 RIT 훈련이 진행됐다.
경북소방학교가 만든 RIT 컴피티션은 3명이 1개조로 6개의 장애물을 통과해 구조대상자를 안전지역에 옮기면 훈련이 종료되는 방식이다. 실질적인 훈련을 위해 대원 면체에는 불투명 테이프도 붙였다.
먼저 문을 개방한 수색팀이 벽을 따라 이동하면 성인이 겨우 기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통로에 맞닥뜨린다. 홀리건 툴로 통로 크기를 감지한 선두(1번) 대원은 장비를 탈착할지 판단하고 관련 정보를 뒤(2, 3) 대원에게 알린 뒤 통과했다. 이때 1번 대원은 대원 모두가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
모든 대원이 통로를 통과하면 알파벳 A 모양의 장애물에 다다른다. 1번 대원은 장애물을 넘기 전 홀리건 툴로 바닥은 튼튼한지, 앞에 장애물은 없는지를 살핀 뒤 헤드 퍼스트 자세를 취하면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다리를 V자 모양으로 벌려 하강 속도를 조절했다.
2번 대원은 RIT팩을 전달한 뒤 1번 대원과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장애물을 통과했다. RIT팩이 장애물에 걸려 이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다음 이들은 턱이 낮고 기어다닐 정도 크기인 통로를 만났다. 1번 대원은 앞 과정과 똑같이 안전 여부를 판단하고 2번 대원에게 정보를 알린 뒤 통로를 통과했다. 대원들은 보유 장비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이후 대원들은 S자 모양의 좁은 장애물에 도착했다. 이곳은 장비를 벗어야만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대원들은 착용한 장비를 벗어 손에 쥔 채 천천히 장애물을 통과했다. 모든 대원은 이곳을 벗어나자마자 신속히 장비를 착용했다.
장비 체결이 완료되고 진행 요원이 면체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구조대상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들은 즉시 구조대상자 의식과 공기 잔량을 확인했다. 공기호흡기가 탑재된 RIT팩을 이용해 공기를 공급하기도 했다.
곧 이어 패킹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등지게 가슴끈을 제거하고 허리띠를 풀어 허벅지 사이로 묶었다. 보통 좁은 공간에선 어깨끈으로 구조대상자를 옮긴다. 가슴끈을 제거하는 이유는 어깨끈을 잡아당기면 가슴끈이 함께 올라와 구조대상자가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패킹을 끝내고 구조대상자를 옮긴 후 마지막 장애물인 댄버 드릴에 다다랐다. 댄버 드릴은 화재진압 중 턱이 있는 공간에 고립되면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 순직소방관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구조물이 좁아 1번 대원이 앞서 통과한 후 구조대상자의 어깨끈을 잡아 올렸다. 구조대상자를 뒤따라온 2번 대원은 밑에서 들어 올렸다. 구조대상자를 완전히 옮기자 2번 대원은 RIT팩을 1번 대원에게 전달한 뒤 헤드 퍼스트 자세를 취하면서 탈출을 완료했다. 모든 대원과 구조대상자가 안전지역에 도착하자 비로소 훈련 종료 휘슬이 울렸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라”… 실화재 훈련
실화재 훈련은 실제 화재 상황을 구현해 진행 단계별 화염과 열ㆍ연기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효과적인 진압 방법을 배우는 교육이다.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실제 화재 현장과 다르다.
미국과 유럽 등에선 1960~1970년대부터, 일본은 1990년부터 실화재 훈련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에선 2010년대부터 실화재 훈련시설을 갖춘 소방학교가 속속 등장했다.
세미나에선 주수 기법ㆍ각도별 화점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는 훈련과 화재 위험성을 줄이면서 건물에 진입하는 ‘화재실 내부 진입절차(도어 엔트리)’, 주수 기법에 따라 물이 천장 어느 부분까지 닿는지를 알아보는 훈련이 진행됐다. 이후 실제 컨테이너 공간(셀)에서 화재 상황을 연출하는 실화재 훈련이 이어졌다.
특히 경북소방학교와 타 지역 소방관들은 주수기법 훈련을 위한 교보재를 직접 제작했다. 홍콩소방학교에선 이런 교보재를 ‘ABC 랙’이라고 부른다. 이 교보재 천장에는 흰색(농연)과 주황색(화염), 빨간색(화점) 등 구역별로 색이 입혀진 술(끈)이 매달려 있다. 교육생들은 이를 활용해 주수 기법ㆍ각도에 따라 물이 화점에 미치는 영향을 눈으로 살펴보며 최적의 진압 방법을 모색했다.
다른 곳에선 소방관들이 화재실 내부 진입 시 안전한지를 판단하고 진입이 어려우면 주수를 통해 내부 환경을 안정화하는 도어 엔트리 훈련이 한창이었다.
각 소방학교에선 도어 엔트리 교육 시 화재대응능력 1급 평가 기준을 준용한다. 그러다 보니 주수 횟수나 문 여닫은 횟수ㆍ시간이 정해져 실제 화재 현장에서 기계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교육생들은 문짝과 문만 설치된 교보재를 활용해 도어 엔트리 훈련을 진행했다. 한 대원은 문을 열 준비를 하고 관창을 움켜쥔 다른 대원은 서서히 문에 접근했다.
이후 문 상부를 향해 주수한 뒤 다른 대원이 문을 열자 문 앞에 멈춰 서서 주수를 했다. 다시 문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펴보고 곧이어 내부로 화재진화 작업을 이어갔다.
훈련이 마무리되자 실화재 훈련이 시작됐다. 하나둘씩 어택 셀(the attack-cell)에 모여든 교육생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어택 셀 훈련은 다섯 명이 한 조가 돼 화재실에 들어가 열화상 카메라로 화재 진행 단계를 관측하는 방식과 6~8명이 도어 엔트리를 진행한 뒤 내부 가스ㆍ화점을 주수로 냉각하는 방식이 동시에 진행됐다.
운동장 한편에선 두 개의 컨테이너가 연결된 T 셀(T-cell) 실화재 훈련이 한창이었다. 교관들은 내부진입 전 교육생들에게 단계별 화재 성상과 화재가스발화(FGI, Fire Gas Ignition) 위험성ㆍ사전 예방조치 등을 안내했다.
FGI는 화재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재가스(가연성ㆍ미연소 가스, 농연)가 개구부와 주요 틈 사이로 이동하고 천장 위 공간에 축적되는 과정에서 공기와 만나면 순간적으로 불이 붙는 현상을 말한다. 외국에선 이를 ‘hidden killer’라고 부른다.
T 셀 문밖으로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자 교관들은 교육생들에게 내부 진입 신호를 보냈다. 이곳에서 교육생들은 FGI 이상 현상과 개구부 변화에 따른 공기 유동 경로를 지켜보며 열기를 피부로 느꼈다. 수압 배연을 통한 공기 유동 경로를 관측하기도 했다.
“체계적인 RITㆍ실화재 훈련 매뉴얼 정립해야”
[인터뷰] 채해승 경북소방학교 소방장
“세미나가 RIT에 관한 인식을 넓히고 화재진압과 관련해 여러 궁금증을 해소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기획부터 운영까지 세미나 전 과정을 이끈 채해승 소방장은 경상북도119특수대응단 등에서 구조대원으로 활동한 10년 차 소방관이다.
채해승 소방장이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경북소방학교는 2021년 전국 최초로 ‘RIT 특별구조교육과정’을 개설하는 등 RIT 분야를 견인 중이다. 올해 3년째 교육을 이어오면서 많은 소방관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경북소방학교에선 화재 성상ㆍ특징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이론ㆍ실기교육을 통해 현장에서 겪는 스트레스와 공포에 대처하고 위험 상황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교육 중이다. 이를 위해 교관들은 국내ㆍ외 소방관 순직사고를 주제로 토론하고 사고 현장과 비슷한 훈련시설을 제작하고 있다. 교육생들이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렇듯 일선 소방관을 중심으로 RIT와 실화재 훈련에 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하지만 평소 소방관들이 RIT나 실화재 훈련을 접할 기회는 적다.
13개 소방학교 중 실화재 훈련시설을 갖춘 곳은 8곳에 불과하다. 게다가 경기와 중앙을 제외하곤 교육 공간이 협소해 많은 인원이 훈련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RIT의 경우 출동부대 편성표 작성 시 인원을 명단에 포함하는 정도에 그쳐 체계적인 훈련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북소방학교에서 RIT와 실화재 교육을 진행할 때마다 많은 소방관이 관심을 보였다. 교육을 희망하는 소방관도 점점 느는 추세다. 하지만 여건상 많은 인원을 교육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이에 동료들이 RIT와 실화재 분야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이번 세미나를 기획했다”
세미나를 처음 기획할 당시엔 소방관들이 모여 RIT와 실화재 훈련 사항을 점검하고 향후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러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즐기는 축제의 장을 만들자란 의견이 모이면서 지금의 세미나 형식을 갖췄다.
“경쟁이 아닌 축제처럼 즐기는 분위기에서 누구나 훈련을 체험하고 교육받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전국에서 많은 분이 도움을 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경북소방학교 모든 교직원이 합심한 덕분에 세미나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원활한 세미나 진행을 위해 연차를 내고 한걸음에 달려온 타 지역 소방관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채해승 소방장이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다름 아닌 ‘안전’이다. 구조대상자의 안전은 물론이고 투입되는 소방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형 RIT 훈련을 만들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우리나라 소방의 화재진압과 구조는 뛰어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소방관 스스로 사고 현장에서 생존하고 위험에 처한 동료를 신속하게 구조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에 집중할 때다”
우리나라 소방에는 RIT와 관련한 매뉴얼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무조건적인 훈련보단 관련 정책과 매뉴얼 정립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채 소방장의 의견이다. 무전 절차나 인원 편성 등이 지역마다 차이가 난다면 아무리 훈련이 잘된 소방관들이라도 현장에서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동료가 현장에서 우리 곁을 떠났다. 더는 그런 슬픔을 겪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있다. 아직 RIT나 실화재 훈련을 잘 모르는 소방관도 많다. 더 많은 소방관이 교육훈련에 관심을 둔다면 아무리 위험한 현장이라도 자신과 동료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최누리 기자 nuri@fpn119.c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7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