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들이 뒤엉켜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2010년 아이티 지진 국제 출동 당시 구조 현장으로 이동 중 시내 묘지 앞에 겹겹이 쌓여 있던 시신들이 떠올랐다. 피가 응고된 채 축 늘어진 팔과 다리, 그 몸통 위로 올려진 시신들을 스치듯 봤다.
많은 시신을 봐 와서 웬만한 장면에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당시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장소와 인종이 다르고 피만 흘리지 않았을 뿐 그때 상황이 실제 수중에서 재연된 거다.
육상에서 보면 한 장의 사진처럼 시야에 들어오지만 수중은 시야가 탁해 한 번에 상황을 다 볼 수 없다. 그래서 인양할 때 실종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확인하고 구조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구조대원들의 심리적 긴장감과 압박감이 크다.
첫 번째 바지선 현장 투입 바지선을 이용하면 구조 보트나 어업 지도선 갑판 위에서 장비를 준비하고 입수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편안하면서도 안정적이다.
사고 발생 4일 차에 해경에서 요청한 민간 수중 공사 업체 바지선이 현장에 배치됐다(이 상황에 대해선 국정 감사 때나 청문회, 언론에서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면상으로 필자가 언급할 사항은 아닌 것 같다). ‘금호수중’에서 보유한 바지선이 처음 투입됐다. 구조 현장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다. 구조대원들과 장비 전부를 갖춰 놓을 수 있을 만큼 여유 공간이 없었다.
맹골수도의 아침저녁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매우 추웠고 한낮에는 4월 봄 햇살이 뜨거웠다. 실내 공간이 있으면 잠시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소방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바지선에는 세월호와 연결된 상승, 하강 라인이 있다. 구조작업은 보트에서 바지선으로 대원들과 장비를 이동시켜놓고 해야 했다. 바지선이 배치된 순간부터 구조 잠수사가 아닌 소방 합동 수난구조대의 안전 담당관과 연락관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바다 위의 이방인 구조 보트와 어업지도선을 이용해 소방 합동 수난구조대(중앙119구조본부, 서울소방, 인천소방, 전남소방)의 구조 대원들이 사고 현장으로 갔다. 소방은 대기할 장소가 없어 일몰 전에 팽목항으로 복귀해야 한다.
물때에 맞춰 수중 수색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도 제한됐다. 아무래도 해경에서 관할 구역도 아닌 소방을 정조 때마다 투입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민간 잠수사도 바지선에 배치돼 실종자 수색작업에 투입됐다. 바다 위 구조 현장에 이방인이 있다면 우리 소방이 아닐까….
소방은 이틀간 바지선에서 수중 수색작업을 했지만 실종자를 인양하지 못했다. 해경에서 실종자를 발견하더라도 인양하지 말고 상황만 파악하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몇몇 직원은 이런 해경의 요청에 화를 냈다.
“다수의 실종자가 차디찬 물속에 있는데 그냥 보기만 하고 수면으로 올라온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어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소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방은 해경의 지시에 따라야 했고 그런 사항들을 대원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다이빙만 잘한다고 구조작업이 잘 되지 않는다. 때론 이해하기 힘든 상황도 있다. 그렇다고 단독 행동을 하거나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원활한 구조작업을 할 수 없다.
소방과 해경, 소방 지휘부와 구조대원 간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중재자와 안내자 역할도 해야 했다. 여태껏 해왔던 임무와 다르고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서서히, 서서히 지쳐갔다.
떠오르는 꽃봉오리들 구조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절대로 감정에 지배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배당하는 순간 집중해야 할 것들을 놓친다. 그러면 내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와 구조대상자의 생명도 위태롭다. 하지만 잘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감정을 다스리는 거다. 필자는 현장에서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쓰지만 힘들 때가 있었다. 그 순간은 바지선이 도착하고 나서 얼마 걸리지 않아 발생했다.
바지선이 배치되고 민간 잠수사 몇몇이 해경 통제하에 구조작업에 투입됐다. 민간 잠수사들은 표면 공급식 잠수 장비를 사용했다. 그래서 수중 통신도 가능하다. 대부분 해난구조대 전역자로 구성됐으며 잠수감독관도 해난구조대 출신이다.
이 인원들은 이때부터 수중 공사ㆍ구난 업체인 ‘언딘’이 철수할 때까지 있었다. 민간 잠수사를 투입한 시점이 앞서 언급한 소방 잠수팀에게 실종자가 있더라도 상황만 파악하고 오라던 그때다.
소방 잠수팀이 구조 잠수를 마치고 바지선에서 보트와 어업지도선으로 다 철수했는데도 혼자 바지선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해경 통제하에 민간 잠수사들이 실종자들을 인양하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실종자 대부분은 구명 부의를 입고 있다는 걸 앞선 수색 과정에서 알았다. 실종자들을 선체 밖으로 빼내기만 하면 구명 부의의 부력 때문에 알아서 수면으로 부상한다.
민간 잠수사들은 실종자를 세월호 선내에서 발견하면 유선으로 연결된 수중통신기로 수면 잠수 감독자에게 통신한다.
“올라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으로 빨간색 구명 부의를 착용한 시신 한 구가 떠오른다. 또 몇 분 있다가 다시 떠오른다. 유명 업체의 운동복을 비슷하게 입고 있어 학생들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내 큰아들보다 한 살 많은 아이들이었다. 다 피지 못한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다. 감정이 요동쳤다.
이런 아이들을 수면에서 대기하던 해경 보트가 인양했다. 이게 초창기 이틀간의 수중 수색 후 인양 작업이다. 누가 결정하고 지시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수사의 안전과 정조 시간이 짧으므로 시간을 절약하기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작업이다. 수중에서는 상승라인에서 구명 부의를 믿고 실종자 혼자 수면으로 상승시키지만 실종자가 안전하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보장이 없다.
실종자가 구명 부의를 단단히 착용하지 않았으면 부력 때문에 상승 중 구명 부의가 벗겨질 수 있다. 그럼 실종자는 다시 심연으로 깊게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바지선과 주위에 떠 있는 선체 바닥으로 들어가도 찾기 힘들다. 이런 방법은 해선 안 된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엔 이것과 관련해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용기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해경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는 건 합리적인 변명이다.
4월 22일 야간에는 소방에서 수중 구조작업에 참여해야 했다. 잠수대원들은 경비함에 대기하고 필자는 바지선에 상주하며 안전 담당관과 연락관 역할을 하라고 지휘부에서 임무를 부여했다.
해경을 통해 바지선과 협의가 된 줄 알고 침낭과 속옷 몇 벌을 배낭에 넣고 바지선에 다시 올랐다. 맹골수도 한가운데 바지선에서 6개월간 체류할 거란 사실을 그땐 미처 몰랐다.
독자들과 수난구조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사건ㆍ사례 위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자 한다. 만일 수난구조 방법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e-mail : sdvteam@naver.com facebook : facebook.com/chongmin.han로 연락하면 된다.
서울119특수구조단_ 한정민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1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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