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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기고/방화복 이야기④]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방화복을 구매할까?

이진규 PBI 퍼포먼스 프로덕트 한국 대표 | 입력 : 2017/02/10 [11:30]
▲ 이진규 PBI 퍼포먼스 프로덕트 한국 대표

업무 때문에 외국 소방본부들의 개인보호장비 구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방화복, 부츠, 장갑, 공기호흡기, 헬멧 등을 어떤 회사가 어느 소방본부에 공급하게 됐는지, 구매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등등. 사실 이런 이야기는 구매선상에 있는 소방공무원이나 장비공급업체가 아닌 이상 큰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시스템과 그들의 시스템이 보이는 차이가 꽤 흥미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광역 소방본부들과 비슷한 규모의 외국 대도시 소방본부들은 개인안전장비 구매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1. 다년계약 vs. 단일계약
개인보호장비의 공급은 다년계약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가령, 뉴질랜드의 2008년 방화복 구매는 5년 기본계약에 소방본부가 1년간 계약을 연장할 옵션을 두 번 행사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이 옵션이 두 번 다 행사됐기 때문에 총 7년짜리 계약이 됐다.


반면 우리 소방본부들은 매번 새롭게 조달공고를 내고 입찰을 받아 방화복을 구매한다. 1년에 한 번, 많게는 세 번까지 공고를 내는 경우도 봤다. 다년계약의 장점은 역시 안정성이다. 한 소방본부의 소방관들이 모두 같은 방화복을 입는다는 것. 방화복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통계적으로 발견하는데도 유리하다. 데이터가 쌓이면 다음 계약 때는 규격에 어느 부분을 보강해야하는지 답을 얻어낼 수 있다.


같은 소방본부 소속 소방관이 같은 방화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방화복 조달의 특징은 매번 입찰 때마다 누가 승자가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한 소방관이 가지고 있는 두 벌의 방화복도 서로 다른 제조사에서 나온 다른 디자인의 방화복일 수 있다.


방화복 제조사 입장에서는 다년계약이 편하다. 한번 계약이 이뤄지면 몇 년간 사용할 원ㆍ부자재의 양이 계산된다. 소방본부 입장에서도 매번 조달공고를 내는 것 보다는 다년계약을 해놓고 필요할 때 마다 약정된 가격으로 구매하는 편이 더 편하다. 다만, 다년계약에 이르는 과정이 꽤나 길고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2. 최저가입찰 vs. 자체규격
방화복을 매번 구매하는 것이 귀찮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조달 진행과정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왜냐하면 많은 소방본부들이 KFI 인정제품 간 최저가경쟁입찰을 통해서 방화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제품이 선정될지는 개찰이 될 때 까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사고 싶은 거 살 수 있는게 아니에요”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어봤다.


그런데 다년계약을 하게 되면 한번 결정된 제품으로 몇 년을 써야 하기 때문에 최저가경쟁입찰로 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자체 규격을 만든다. 최소기준인 EN 469(유럽)나 NFPA 1971(북미)를 기본으로 하되, 최소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소방본부가 원하는 규격을 만든다. 겉감, 방수투습천, 안감, 반사테이프는 어느 정도의 성능을 가진 제품을 사용할 것인지, 주머니의 위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지퍼나 단추의 위치 크기, 팔꿈치 무릎 덧댐의 위치와 크기 등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개인안전장비 구매 담당자 혼자 할 수 없다. 위원회를 구성하고 소방관들의 의견을 듣는다. 방화복 제조사 뿐만 아니라 원단 제조사, 각 부품 제조사들의 이야기도 듣고 자료도 수집한다. 무엇이 최적인지를 토론하고 고민해 규격을 결정하면, 그 규격에 맞춰 입찰공고를 낸다. 규격을 잘못 썼다가는 사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꼼꼼하게 쓰게 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방화복 제조사들은 규격을 보고 샘플 방화복을 제작해서 내놓는다. 그러면 샘플 방화복을 가지고 필드 테스트를 실시한다. 스코틀랜드 소방구조본부는 2016년 개인안전장비 조달과정에서 한 달 동안 필드 테스트를 실시했고, 벨기에 역시 2014년 신규 방화복 선정 때 샘플 방화복을 직접 소방관들에게 입혀보고 방화복의 착용감과 움직임을 확인해본 바 있다.


3. 종합평가
필드 테스트가 있다는 것은 소방본부가 방화복을 가격만 보고 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은 물론 중요한 요소이지만, 방화복의 방호성능, 기능성, 혁신성 역시도 중요한 고려요소다.


가격 외에 다른 부분도 본다는 것은 방화복 제조사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다른 제품에 비해서 나은 점을 만들어내야 선택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 성능, 디자인의 혁신은 소비자가 원할 때 일어난다. 2014년 벨기에의 신규방화복 조달과정에서 후보 중 최고이자 최고가의 제품이 선정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우리는 방화복 제조사들로부터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구매제도를 가지고 있는지 재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현재 국내 방화복 시장에서 의미있는 혁신은 비용을 절감하는 혁신 뿐이다. 그것이 최저가경쟁입찰제도 하에서 승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4. 현장소방관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참여
재미있는 점은 고성능 제품을 선택하는 소방본부들의 특징은 구매과정에서 현장소방관들을 대표하는 소방관들의 목소리가 반영됐다는 점이다. 홍콩소방청의 소방노조를 비롯해, 영국, 미국 등 많은 국가의 소방노조가 개인보호장비 구매에 참여 최고의 제품을 고를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낸다. 이들에게 동료 소방관들의 안전과 건강 확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협의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개인보호장비산업의 발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결어
타국의 구매관행을 우리가 그대로 들여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개인보호장비를 구매함에 있어 소방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끊임없이 소방의 특수성을 주장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목숨이 오고가는 장비를 구매하는 것을 마치 복권 긁듯이 사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게 그거다”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그 제품들을 쓰게 된다. 조금이라도 나은 제품이 있을 때 그 제품을 고르면, 경쟁에서 탈락한 업체는 다음번에는 더 좋은 것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시장에서 퇴출된다. 소비자를 이기는 생산자는 없다.


미국 소방본부들의 입찰제안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문구로 이 글을 맺는다.


“화재진압은 극단적이고 불가피한 위험을 수반한 활동이므로, 오직 개인안전장비 분야에 대한 구체적 지식을 갖춘 훈련된 소방본부 담당자만이 소방본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적절한 제품의 선택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진규 PBI 퍼포먼스 프로덕트 한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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