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4일 부산 개금동의 한 아파트에서 열 살, 일곱 살 자매가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첫 사고 발생 이틀 뒤 “열 살,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자매가 밝은 미래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떠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진다”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SNS를 통해 애도와 다짐의 뜻을 밝혔다. 이어 화재 예방과 피난시설 점검 등 근본적인 안전대책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정부 차원의 재발 방지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반복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제도가 있고 장비가 있어도 현장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방시설은 누군가가 점검하고 작동시켜야 하며, 피난 유도는 훈련된 전문가가 있어야 비로소 실행된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지금 우리가 운영하는 소방안전관리제도는 현장에서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방파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물의 소방안전은 오랜 시간 ‘시설’ 중심으로 관리돼 왔다. 그러나 반복되는 대형화재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재난의 순간을 통제하는 건 사람이란 사실이다. 소방시설이 아무리 완비돼 있어도 현장에서 판단하고 움직일 사람이 없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소방안전관리자의 역할이 단지 서류상 요건으로 존재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실질적 ‘기능’으로 작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우리 제도는 여전히 실체보다 형식을 우선한다. 소방안전관리자는 전국 약 40만 개 건축물에 선임돼 있지만 이 중 절반가량은 업무를 외부에 위탁하고 있고 상당수는 비상주다. 겸직이 허용되고 업무기록은 월 1회면 충분하며, 그 기록마저도 대행업체가 대신 작성해주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령 소방안전관리자’는 화재의 초기 대응을 이끌 수 없고 책임도 회피되는 구조 속에 방치된다.
현장에서 소방안전관리자 교육을 해오며 가장 뼈아프게 느꼈던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소방안전관리자로 선임됐지만 정작 본인은 책임 범위를 알지 못하고 비상상황 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도가 허용한 ‘부재’는 결국 안전을 위협하는 치명적이고 값비싼 공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소방청장은 지난해 4월 23일자 서울신문 기고문에서 “AI 기반 정밀 점검체계와 화재예측 알고리즘, 자동화 시스템을 활용한 선제적 예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올해 6월 30일자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산업현장의 사고예측 모델 고도화와 스마트 안전관리 플랫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 기관 모두 ‘현장 중심 + AI 기반’이라는 방향성이 안전관리의 미래임을 강조한 것이다.
화재예방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람이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 위에,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전에 위험을 감지하고, 이상 징후를 판단하며, 자동 경보ㆍ초기 진압까지 연계되는 AI 기반 대응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컨대 소방청이 개발 중인 ‘스마트 소방안전관리 통합 플랫폼’은 다중이용시설의 이상 징후를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발화 전 조기경보를 통해 선제 대응이 가능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민간 일부 대형 건축물에서는 IoT 열ㆍ연기센서와 연동된 AI 분석기로 설비이상 징후를 자동 감지하는 시스템이 이미 시범 도입되고 있다. 단순한 시설 보완을 넘어 기술과 제도의 융합이 필수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현행 소방안전관리제도는 제도의 형식적 운영과 책임자 부재 등 여러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특히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소방안전관리자나 자위소방대는 실제 화재 상황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법령의 미비가 아니라 제도의 실효성과 현장 적용성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제는 단편적 보완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형식이 아닌 실질을, 명목이 아닌 기능을 중심으로 제도를 전면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방안전관리제도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 소방안전관리 일부 업무의 위탁 여부에 상관없이 전문자격을 갖춘 소방안전관리자를 반드시 두고 상주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특히 중대형 건축물은 겸직과 비상주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실질적 업무 수행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인력과 재정 여건 등을 고려해 위험도가 높은 대상부터 점진적으로 상주 체계를 확대하는 단계적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 소방안전관리의 기록은 단순한 ‘보고용 문서’가 아니라 현장의 ‘블랙박스’가 돼야 한다. 건물의 운영시간 동안 누가 무엇을 관리하고 대응했는지 명확히 기록돼야 하며, 디지털 기반 기록 시스템을 통해 실시간 확인ㆍ감독이 가능해야 한다. 위험물안전관리자의 위험물 취급일지처럼 소방안전관리자도 실질적 추적성과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훈련을 비용이 아닌 의무로 인식해야 한다. 독일과 일본처럼 월 단위 실전 훈련을 제도화하고, 상황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대응 훈련을 통해 현장의 자동화된 반응력을 길러야 한다. 훈련은 생명을 지키는 반복의 기술이다.
넷째, 이 모든 기반 위에 AI 기술을 활용한 예측형 소방안전관리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센서 기반의 위험 감지, 설비 고장 예보, 위험 패턴 분석, 그리고 자동 초기 대응까지 연결되는 시스템은 미래형 소방안전관리의 필수 인프라다. 사람과 기술이 함께 작동하는 하이브리드 체계가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전제가 돼야 한다. 소방안전교육 또한 최신 디지털 기자재를 활용한 실습 중심 교육을 확대해 교육생들의 이해도와 몰입도를 높여야 한다. 나아가 개인별 교육이력과 소방시설 자체점검 결과를 빅데이터로 축적해 AI 기반 업종별 맞춤형 교육, 교육이력 관리, 경력관리까지 연계하는 체계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자위소방대에 대한 근본적 전환도 필요하다. 지금처럼 명목상 유지되는 조직이 아니라 각 층ㆍ부서 단위에서 즉각 대응 가능한 실질 조직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역할은 고정이 아니라 유연해야 하고, 반복된 훈련을 통해 어느 누구라도 화재 초기 대응이 가능해야 한다.
소방안전은 위임도, 위탁도 불가능한 책임이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타인에게 넘길 수 없는 본질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현장의 책임자, 훈련된 전문가, 예측 가능한 기술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고는 어떤 설비도, 어떤 법도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
소방안전관리자는 더 이상 법률에만 존재하는 이름이 돼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들이 실제 현장에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와 구조를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소방관'에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맡겨둘 수 없다.
현장에 없는 제도는 제도가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말이 아니라 현장을 책임지는 사람과 그것을 뒷받침할 제도로 지켜져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과연 그 의지를 실천할 수 있을지. 그 선택의 결과는 역사와 국민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한국소방안전원 부산지부 시상수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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