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제로 콜라 남극에 밤이 찾아왔다. 백야가 끝나고 밤이 찾아오는 건 하계시즌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하계연구팀은 철수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낸다.
기지의 월동연구대원들도 한국으로 반출할 물품들을 정리하고 포장하는 작업으로 얼마 남지 않은 하계시즌을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날은 해안 경계표시 깃발을 설치하러 부두에 나갔다. 해안 경계표시를 하다가 바다로 눈을 돌린 순간 갑자기 저 멀리 해안선 끝에 주황색 아라온호가 눈에 들어왔다. 반갑기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라온호가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기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일정이 조금 앞당겨질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다.
아라온호는 하계시즌 종료에 따라 하계연구대원들의 출남극 지원과 이번 시즌의 마지막 보급 물품을 지원하게 된다. 또 기지에서 반출할 각종 장비와 연구 샘플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보급되는 물품들은 동계기간 먹을 신선식품들과 하계시즌을 보내며 예상하지 못했던 장비들, 중장비 부속 같은 긴급지원품이라 1, 2항차 때처럼 많진 않았다. 하계시즌을 보내면서 필요한 개인물품들도 뉴질랜드에 있는 에이전시를 통해 구매 신청을 하고 이번 3항차에 받을 계획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아라온호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분주했던 기지가 더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하계연구팀과 지원인력이 철수하면 업무량이 조금은 줄고 여러 명이 쓰던 숙소를 혼자 사용할 수 있어서다.
그렇게 아라온호가 기지 앞에 정박하자 하역 일정과 출남극 인원의 아라온호 탑승일이 결정됐다. 바로 다음 날 하역작업이 시작됐다.
우선 동계기간인 약 8개월 동안 먹을 신선식품들이 헬기를 통해 기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긴급 요청한 일부 장비들과 대원들이 기지에서 구할 수 없어 구매 요청한 물품들이 도착했다.
도착 물품을 기지로 옮기고 정리하는데 생물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모두 생물대원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는 코카콜라 박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코카콜라가 왜?’
그 박스를 보자 다른 대원 몇 명도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알고 보니 젊은 연구반 대원들이 뉴질랜드 에이전시에 제로 콜라를 요청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로 콜라가 아닌 일반 콜라가 와버린 것이다.
뉴질랜드 에이전시가 여러 제품을 구매하다 보니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았다. 굳이 제로 콜라를 찾지 않는 나는 그게 뭐 큰 대수인가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던 것 같았다.
이날 이후로도 수시로 제로 콜라를 찾았다. 잘못 배달된 코카콜라는 헐값에 다른 대원들에게 팔리거나 가끔 행사 때 인심 쓰듯이 기부됐다.
남극을 떠날 때 아라온호에 제로 콜라가 있는 걸 보고 젊은 대원들은 환호를 질렀다. 그리고는 즉시 한 캔을 따 마시면서 사진을 찍어 당시 비명을 질렀던 생물대원에게 전송했다.
생물대원은 연구 일정 때문에 10차 월동연구대가 출남극할 때 함께 하지 못했다. 석 달 후 나갈 수 있었던 그는 여전히 제로 콜라가 존재하지 않는 기지에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콜라 사건을 제외하고 하역작업은 특별한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이틀 후 하계지원인력과 하계연구대원들이 아라온호에 탑승하기 위해 헬리패드 앞으로 모였다. 떠나는 이들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모두 표정이 밝았다.
남아있는 우린 헤어짐의 아쉬움과 시원섭섭한 양가감정이 들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하계대원들은 차례차례 헬기에 올랐다. 그렇게 그들은 떠나가 버렸다.
이제 우리만 여기에 남았다는 생각에 공허한 느낌이 들 무렵 아직 아라온호에 보내지 못한 물건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라온호에 실릴 물건은 바로 살아있는 어류였다.
생물대원은 남극대구로 불리는 Trematomus bernacchi를 수차례에 걸쳐 채집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기지 수족관에 있던 어류들을 산채로 아라온호에 보내야 했다. 그러려면 포장과 동시에 바로 헬기로 운반해야 했다. 생물을 살려 이송해야 했기에 이동시간을 줄이는 게 가장 중요했다.
헬기가 이륙하자마자 생물대원은 준비한 포장 용기에 어류를 신속하게 옮겨 담았다. 그런 후 헬기 착륙장으로 이동해 헬기 네트에 옮겼다. 나중에 듣기로 다행히 대부분 어류가 무사히 한국까지 생존한 상태로 잘 도착했다고 한다. 어류까지 무사히 보내고 나니 이제 마지막 남은 사람은 헬기 팀밖에 없었다.
하계시즌 동안 인원과 화물 수송을 담당했던 헬기 2대 중 한 대는 기지의 헬기 격납고로 옮겨 보관하고 나머지 한 대에 헬기 팀이 탑승해 아라온호로 떠날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헬기 팀과 기념촬영을 했다. 수석 파일럿의 대표 감사 인사를 끝으로 그들은 헬기에 탑승해 아라온호로 떠나갔다. 헬기가 이륙하고도 한참 손을 흔들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아라온호는 헬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테라노바 만 해역의 해빙을 가르며 뉴질랜드로 향했다. 그렇게 아라온호가 떠나면서 깨진 해빙의 흔적들은 극야가 시작되기 전까지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해빙에 나갈 때마다 그날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곤 했다.
그렇게 남극의 테라노바 만에는 18명의 월동연구대원만 남게 됐다.
남겨진 우리 헬기 팀마저 떠나고 남은 우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식당에 모두 모여 남은 월동기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대장님의 브리핑과 회의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가장 중요한 빅 이벤트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약 8개월간 사용하게 될 ‘방 추첨’이었다. 장보고 과학기지의 객실은 총 24개로 하계기간 최대 체류 인원은 80명이다. 그렇다 보니 하계기간에는 한 객실을 서너 명이 사용하는데 하계대가 철수하면서 드디어 1인 1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음 하계시즌까지 8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사용할 방이다. 따라서 기지 내 생활 동선이나 전망, 통신 시설 등을 고려해 각자 선호하는 방의 우선순위를 마음속에 두고 추첨에 임했다.
일반 아파트에 층간 소음이 있다면 장보고 기지는 측벽이 분리돼 있지 않고 얇아서 측간 소음이 존재한다. 이웃이 누가 되는지가 방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 이유다.
추첨을 통해 우선권을 가진 대원들은 좋은 위치의 방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순위에 방을 선정해야 하는 대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정하지 못해 본인이 지내야 할 방을 다시 한번 가보고 이웃을 살피면서 힘겹게 결정하기도 했다.
환호와 절망의 탄식이 엇갈린 방 추첨이 마무리됐다. 저녁 식사 후 기지 대이동이 시작됐다. 이삿짐센터 트럭 대신 접이식 카트를 이용해 짐을 옮기고 입주 청소를 하느라 모두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속에서도 나를 포함한 일부 대원은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기존 본인 방을 사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룸메이트가 빨리 방을 빼야 1인실의 여유를 느낄 수 있기에 룸메이트의 이사를 도와야만 했다. 그래도 이사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저녁을 보냈다. 이날 밤은 늦게까지 복도에 카트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떠나고 처음 맞이하는 아침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일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선 그동안 제공되던 아침 식사가 자율배식으로 바뀌었다. 2명의 조리 보조대원이 출남극 하면서 생긴 일상의 변화였다. 이날 이후 대원들은 돌아가며 조리를 보조해야 했다.
덕분에 우린 그동안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던 주방 출입이 가능해졌다. 모두 주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조리 대원으로부터 주방 조리도구와 화구 사용법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식자재 사용 시 주의사항 등을 들었다.
아침 식사뿐 아니라 주말에도 자율배식으로 바뀌면서 조리 대원이 준비한 음식 말고도 직접 요리해 먹을 수 있다는 게 큰 변화였다. 한국에서야 먹고 싶은 음식을 쉽게 먹을 수 있겠지만 남극에서는 식단표에 제공된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보니 내가 먹고 싶을 때 당장 먹지 못하는 아쉬움이 매우 크게 다가왔었다.
하지만 직접 요리해 먹는 게 가능해지면서 그동안의 아쉬움을 해결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식자재에 한계가 있어 남극을 나올 때까지 먹고 싶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월동연구대원 18명만 남겨진 장보고 과학기지에서 또 다른 변화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경기 파주소방서_ 김성한 : sunghan21@gg.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8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