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소방용품 형식승인 개정은 개악?”… 소방청에 날아간 소장업계 “기존 형식 완전히 없애는 건 문제”, 소방전기류 제조사 집단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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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N 최영 기자] = 소방전기류 용품을 제조하는 업체들이 들고 일어섰다. 큰 폭으로 변경되는 소방용품 기술기준 때문이다. 업계는 “모든 경제적 부담을 업체에 떠넘기는 것도 모자라 현실적으로 실행조차 어렵다”며 소방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FPN/소방방재신문> 취재결과 확인됐다.
지난 4월 9일 소방청은 감지기, 중계기, 수신기, 경종, 발신기, 유도등 등 6종 소방용품에 대한 기술기준을 각각 개정ㆍ발령했다. 소방용품 기술기준 선진화를 명분으로 개정된 이 기준들에는 각각의 소방용품 시험 규정에 일정 시험을 추가 도입하는 내용들이 담겼다. 소방용품의 기준을 한층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업계는 기준 고시가 “사실상 모든 소방용품에 대해 전부 새로운 형식승인을 받도록 강제하고 있어 엄청난 재산상 부담을 떠안게 됐다”며 관련 고시의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소방용품 기술기준은 오랜 과거부터 주기적으로 변경이 이뤄지고 있다. 새롭게 기준이 바뀌면 일정 기간 내 해당 기준에 맞도록 형식승인 등을 다시 받도록 강제한다. 익숙할 만도 한 이런 기준 개정 정책이 논란에 휩싸이는 이유는 뭘까. <FPN/소방방재신문>이 집중취재했다.
“싹 바꾼다” 소방용품 기준 선진화 정책
소방청은 지난 2018년 소방용품의 기술기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겠다며 소방용품 기술기준의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소방용품 기준이 UL이나 FM 등 국제 수준에 못 미쳐 신뢰성이 저하되고 소방산업의 해외 진출까지 저해시킨다는 점을 정책 추진 배경으로 들었다.
이를 위해 소방청은 기존 형식승인 제품과 ‘우수품질인증’을 통합해 소방용품의 품질을 전반적으로 높이는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31개 품목을 4개 그룹으로 분류해 점진적으로 기준을 강화해나간다는 방침이다.
소방용품 ‘우수품질인증’ 제도는 일반적인 형식승인 소방용품과 차등화된 우수제품의 인증체계를 확립해 품질 위주 시장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목적으로 2004년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2019년 범부처 ‘인증제도 실효성 검토’ 결과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받으며 폐지 결정이 내려졌다. 인증 제품에 대한 지원정책 등이 미비해 제조사들의 유인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으며 결국 실패한 정책이 됐다.
이후 소방청은 이 우수품질 기준에서 정한 수준으로 기존 소방용품에 대한 형식승인 기준을 개선하기로 했다. 이후 2019년부터 본격적인 기준 개정 작업에 돌입한 소방청은 2021년 3개 품목에 대한 기준 개정을 시작으로 2022년 12, 2023년 16개 품목을 개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규제심사 등에 따른 개정 작업이 늦어지면서 올해 들어 바뀐 기준들이 줄지어 고시되는 등 속도를 내고 있다.
경제적 피해는 업체들이 독박, KFI만 이득?
소방청에 행정소송을 제기한 소방용품 제조업체들은 모두 자동화재탐지설비 등 소방 전기류로 분류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소송에 참여한 기업은 현재까지 18개사다. 자동화재탐지설비 등을 생산하는 업체 숫자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앞으로 이 소송에 동참하는 업체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소방청에 “관련 고시 시행으로 인해 심각한 재산적 손해를 입고 향후 사업의 지속 여부까지도 불투명한 상황이 돼 사건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며 6가지 소방용품 형식승인 기준 고시에 나온 부칙 내용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도등과 경종, 수신기, 발신기, 감지기, 중계기 등 형식승인 기준의 부칙에 있는 ‘이 고시 시행일로부터 1년 이내에 개정 규정에 따라 다시 형식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삭제해달라는 것이다.
통상 소방용품 기술기준이 변경되면 부칙에서 정한 기간까지 기존 형식승인이 유지되고 제품검사 역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는 기존 형식승인이 존재하더라도 제품검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소멸한 거나 다름없게 된다.
업계는 이 부칙 조항을 두고 “이미 형식승인을 받은 소방용품에 변경 기준만을 새롭게 적용해 생산하더라도 전체적인 형식승인을 다시 받도록 강제하고 있다”며 기준 운용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하나의 소방용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제품 개발 기획과 디자인, 시제품 생산, 성능 검증 등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위해 못해도 3~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제품 난이도에 따라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억까지의 비용 투입이 불가피하다.
업계는 “이번 기준 개정에 따라 형식승인을 받으려면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이하 KFI)에 적게는 몇백, 많게는 천만원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며 “더욱이 변경된 기준은 제품에 따라 6~16개 정도로 사실상 기존 제품을 이용해 새로운 기준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모든 제품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기에 업체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너무 과중하다”며 “소규모 업체들의 사업 지속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토로했다.
소방청이 모든 재산상 부담을 업계에 전가하면서도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는 건 법익 균형성과 피해의 최소성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처사라는 게 이들 주장이다.
이들은 고시 개정에 따른 소요 비용을 합치면 220억원을 넘는다는 통계치도 내놨다. 업계에 따르면 제품 1개당 소요되는 형식승인 비용은 600~1700만원 정도. 각 제조사가 현재 생산하고 있어 형식승인을 다시 받아야 하는 제품 건수는 2057건에 달한다. 이 제품들을 승인받기 위해 투입돼야 하는 비용을 222억3천만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업체들은 “현재 침체된 건설업 경기 등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큰 부담이 되는 액수”라며 “더욱이 향후 3~4년 안에 변경 기준에 따라 또다시 전면적인 형식승인을 강제할텐데 사업의 지속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게 사실이다”고 했다.
또 “그런데도 이러한 전면적인 형식승인 강제가 거듭될수록 KFI의 실적은 나날이 좋아지는 게 현실이다”며 “업계에는 지나친 경제적 부담을 주는 동시에 독점 기관인 KFI에는 커다란 경제적 이득을 안겨 주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1년 내 모든 제품 형식승인… “가능하긴 하나?”
업계는 1년의 제한 기간을 둔 고시 부칙이 시간적ㆍ물리적 측면에서 현실성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형식승인을 받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은 공휴일을 제외하고 최소 40일에서 최대 80일까지 소요된다. 소방청이 추산한 2057건에 달하는 제품 실험을 완료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업계는 “소방청 고시 입법 예고 당시 분석 자료에는 유도등 48개사 596건, 경종 29개사 46건, 수신기 80개사 315건, 발신기 34개사 79건, 감지기 104개사 673건, 중계기 55개사 348건의 형식승인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승인 자체를 독점하는 KFI가 2021년에는 421건, 2022년 379건, 2023년 392건의 형식승인을 수행했다는 점을 볼 때 단 1년 내 2057건을 모두 완료하는 건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게다가 형식승인 과정에서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발견되면 보완에 따른 절차를 다시 진행해야 하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강제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업계는 과거 기준 개정 고시가 있을 때마다 행하던 비정상적인 검ㆍ인증 실태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기술기준이 바뀔 때마다 시행 시기에 앞서 기존 형식 승인품을 과잉생산해 재고를 확보한 뒤 이를 기준이 바뀐 뒤에도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업계는 “이는 제품의 설치 직전 이상 여부를 확인해 시중에 유통하도록 하기 위한 생산제품검사 취지와 배치되는 행위지만 업체들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며 “그렇다보니 대부분 이런 방법으로 고시 개정을 대비하고 KFI도 이를 묵인하는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제품이 수십년간 멀쩡할까?”… 사후관리도 문제
변경된 소방용품 기술기준이 기존 제품의 생산까지 완전히 막아버리면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이미 시중에 이미 보급된 수많은 제품의 사후관리다. 과거 형식승인 제품의 생산 자체가 원천금지되면 기존 제품을 설치한 현장에서 발생한 수리와 교체 등이 어렵기 때문이다.
업계는 “건물은 시간이 지나 노후되고 누수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기존 설치된 여러 전자장비 역시 고장이 생길 수 있고 교체가 필요하다”며 “자동화재탐지설비를 구성하는 감지기와 중계기 등의 형식승인이 사라지고 새 제품만 보급된다면 전체를 교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지기와 중계기, 수신기는 접속 가능 제품 표기를 의무화하고 있어 개정 이전과 이후 제품이 서로 기술적 호환이 가능하더라도 위법사항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무작정 최신품으로 교체하기도 어렵다”며 “하나의 제품 부속 고장으로 인해 전체 시스템을 교체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문제는 관련 업체들만의 피해가 아닌 소방용품을 사용하는 국민에게도 큰 불편과 경제적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한다. 업계는 “기존 제품 생산을 못 하게 하는 건 업계뿐 아니라 기존 소비자들이 입는 피해도 불 보듯 뻔하다”며 “이는 현장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 채 관련 업체에만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다면 단계적 시행하고 경제적 부담도 해소해야”
관련 업계는 기술기준의 원활한 시행을 위해선 단계적인 시행과 함께 과도한 경제적 부담 경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처럼 모든 제품의 기술기준을 한 번에 시행하는 건 지나친 부담을 줄 뿐 아니라 모든 제품의 형식승인 실험을 위한 여건도 마련돼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업계는 “수많은 기술기준을 한 번에 시행할 게 아니라 4~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며 “품목별로 나눠 기준을 통과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조치도 요구하고 있다. 업계는 “KFI는 자체적으로 수수료를 책정해 모든 소방용품 생산업체로부터 수수료를 받는데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인 실정이다”며 “이 비용 역시 전부 제조업체가 부담해야 하는데 비용 산정 또한 얼마나 투명하고 합리적인지는 검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기술기준 개정을 추진한다면 형식승인 수수료를 지원해주는 방안이나 저렴한 비용으로 형식승인 절차를 진행해주는 등의 대책이 제시돼야 한다”면서 “ 새로운 기준 적용을 위한 경과규정이 없고 단지 1년 동안만 기존 제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건 사실상 업체들에 대한 소방청의 횡포다”고 못 박았다.
소방청 소송 대응 중… “답변은 어려워”
소방청은 업체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소방청 혁신행정법무담당관실 관계자는 “소송이 현재 진행 중인 것은 맞다”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행정소송이 들어온 만큼 보안을 유지하되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번 행정소송에서 법원이 소방업계 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소방청의 소방용품 기술기준 개정 방식은 과거나 최근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까지 소방청이 시행해온 행정 체계를 두고 근원적인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서다. 나아가 수많은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며 오랜 기간 사업을 해온 제조사들은 그간 소멸한 형식승인과 새로운 승인 비용을 놓고 줄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방용품을 새로 개발하거나 형상 또는 품질, 재질 등을 자체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승인을 다시 받는다면 모든 비용을 감수하는 게 맞다”며 “기존 제품의 성능이 안전에 위해를 줄 만큼 치명적이지 않음에도 정부 정책으로 인해 기준을 고치는 것마저 모든 부담을 기업에만 준다는 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그동안 많았다”고 말했다.
또 “소방용품의 승인을 내주는 독점 체제의 KFI와 소방청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뿐이지 공론화가 이뤄지면 불합리성에 대한 문제의식 차원의 논란이 더 커질 수 있다”며 “이번 기회에서 소방용품 검ㆍ인증체계를 재점검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최영 기자 young@fpn11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