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층 이상의 건축물에 화재 등 재난이 발생하면 피난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자칫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공동주택의 규모가 커지고 상가와 연계한 주상복합 아파트 등의 건축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위험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행법은 10층 이하의 건축물까지만 완강기 등의 피난기구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11층 이상부터는 피난기구 설치기준이 부재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피난기구도 없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최근 들어서는 고층 건축물에 적용할 수 있는 피난시스템의 개발이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현재 주목 할 만한 제품이 개발되는 등 일부 제품은 시판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소방방재청은 관련 부처 및 시장의 요구에 따라 지난해 11월 고층건축물에 적용할 수 있는 승강식 피난기와 다수인용 피난장비, 하향식피난구용 내림식사다리 조항을 국가화재안전기준 내에 신설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개정안은 단순히 제품의 설치기준 등에 대해서만 명시돼 있었고 11층 이상의 적응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어 대다수 전문가들은 부실한 법 개정으로 실효성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화재안전기준 개정에 앞서 소방방재청은 규제영향분석을 실시했으며 피난기구의 종류를 다양화시켜 소비자들 선택의 폭을 넓히고 고층건축물에도 적용이 가능한 피난기구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힌바 있다.
특히 당시 공개됐던 규제영향분석서에는 승강식피난기를 비롯해 다수인피난장비와 하향식피난구용 내림식사다리의 경우 11층 이상 층에 설치할 수 있고 고층건물 인명구조 및 피난에 효과가 있다는 적정성이 평가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규제영향분석을 통해 고층건축물에 적합하다는 판정까지 마친 제품들이지만 정작 개정법령(국가화재안전기준 제4조 1항 관련 별표1)에서 그 적응성을 명시 해주지 않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적용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소방방재청에서는 현재 자진설비로 설치가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법령에서 적응성을 명확히 두지 않아 이를 바라보는 건설사 등 국민적 시각에선 11층 이상에 실효성을 갖는 것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수익을 우선시 하는 건설현장에서 법적인 강제가 아닌 이상 국민의 안전을 위해 이 같은 피난기구를 자발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힘든 상황이다.
한편 개정 법령은 새롭게 명시된 제품 모두 한국소방산업기술원 등 법률로 지정한 기관의 성능 검증을 받도록 하고 있다.
법률의 뒷받침이 부족해 제품이 출시돼도 자진설비로 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품의 성능에 대한 인증은 의무적으로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은 고층 건축물의 피난시스템 부재로 오는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서는 제품의 성능인증에 대한 기준까지 마련돼 있는 만큼 완강기와 같이 11층 이상 건축물에 설치하는 피난기구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설정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더불어 선진 외국과 같이 완강기의 사용범위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 소방방재청과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은 국내 완강기 및 지지대의 최대 사용하중을 상향조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선진 외국의 경우 이미 고층 건축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완강기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제조기술이 발전한 만큼 고층 건축물에 적용할 수 있는 완강기 개발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여론이다.
인터뷰 - 동원대학교 소방안전관리과 최규출 교수“입주민 화재안전 위해 법률 적용 시급”
▲ 동원대학교 소방안전관리과 최규출 교수 ©신희섭 기자 | |
지난해 보건복지부 연구용역인 ‘사회복지시설 화재안전관리 방안 연구’의 총 책임을 담당했던 동원대학교 최규출 교수는 피난기구에 대해 누구보다 높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11층 이상 건축물에도 적용할 수 있는 제품이 개발돼 유통되고 있는 만큼 11층 이상의 건축물에도 피난 기구의 설치를 의무화 시켜야 하며 사회복지시설 등과 같은 노유자 시설은 일반적인 건축물에 설치되는 피난 기구의 효용성 및 안전성이 제한되는 만큼 실효성 있는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것의 그의 주장이다.
최규출 교수는 “지난해 소방방재청은 11층 이상 건축물에 적용할 수 있는 승강식피난기와 다수인피난장비, 하향식피난기구인 내림식사다리를 피난기구의 화재안전기준에 새롭게 정의했다”며 “하지만 개정안에는 설치기준만 있을 뿐 11층 이상 건축물에 설치를 해도 된다는 문구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피난기구의 경우 소방대상물의 설치장소별 적응성을 국가화재안전기준에서 규정하고 있다. 현행 피난기구의 화재안전기구 별표1을 살펴보면 지하층과 2층, 3층, 4층 이상 10층 이하로만 적응성을 나눠놓고 있으며 11층 이상 건축물에 대한 적응성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최 교수는 “현장에서 소방시설의 적용 여부는 관련 법령 및 고시 등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이뤄진다”며 “특히 피난기구와 같은 설비는 입주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의무적인 설치가 아니면 건축주나 시공자의 자발적인 설치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사회복지시설의 피난기구 역시 법률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복지 시설의 경우 출입문 등 개구부에 창살 및 잠금장치의 설치로 인해 화재 시 신속한 대피가 제한되고 있는 만큼 건물 내부로 통하는 피난기구의 설치가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최규출 교수는 “보건복지부 연구용역을 진행할 당시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실사를 진행한바 있다”며 “대다수 사회복지시설에서 경사 강하식 피난기구를 설치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고려해 본다면 이와는 무관하게 별도의 피난기구 설치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또 “고층 건축물 적용을 위해 개발된 승강식피난기의 경우 무동력 시스템으로 기존 엘리베이터와 달리 전기가 끊어져도 사용이 가능하다”며 “특히 승강대가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상하층을 왕복 주행하여 자력 피난이 어려운 중증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노인시설에 적합한 피난시설이라고 판단된다”고 전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 당장 11층 이상 건축물에 피난기구를 의무화시키는 것은 물론 재해취약계층이 이용하는 사회복지시설 등의 피난에 대한 보완책 역시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희섭 기자
ssebi79@fpn11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