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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성능위주의 설계, 제자리를 찾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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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소방방재학과 교수 윤명오 | 기사입력 2012/10/10 [11:17]

[특별기고] 성능위주의 설계, 제자리를 찾아가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소방방재학과 교수 윤명오 | 입력 : 2012/10/10 [11:17]

‘성능위주설계’의 도입은 소방엔지니어링 기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범세계적으로 성능위주의 설계가 활성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관련 법규가 갖추어지면서 수도권이나 대도시 소방본부에서 ‘성능위주설계심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시방규정’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경제적이고 창의적인 설계를 할 수 있다면, 설계자도, 건축주도, 그 사회도 모두 기뻐해야 할 일임은 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어렵게 시작한 이 제도를 둘러싼 각계의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비판적 내용의 상당부분은 이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성능위주설계’는 지금 매우 절실한 ‘전환’의 요구에 당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이 제도와 관련하여 국가 R&D를 추진한 바 있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적잖은 의견을 개진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날 제기되는 문제점들이 충분히 이유 있는 것이라 동감하고 있다. 사실 현재 법규와 관련하여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대부분의 내용들은 제도개발 초기부터 잘 인지되어있었던 사항들이다.

단지 유감스럽게도 견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이해부족이나 힘의 논리에 따라 왜곡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세계적 흐름을 갖는 이 제도의 정당성이나 타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이며 결국 소방전문인의 정체성, 나아가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필자는 현행 소방성능위주설계제도의 특성과 문제점을 짚어보고, 나아가 그 대안을 찾아봄으로써 이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의 장에 참여코자 한다.

보편적 성능설계제도와의 괴리가 문제의 원점

주지의 사실과 같이 우리의 성능설계제도는 그 경위야 어떠했든 제 외국의 경우와 대비하여 몇 가지의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그 도입배경이 달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제 외국의 경우처럼 안전설계의 투자효율을 제거한다거나 신기술의 활용을 통한 창의적 공간을 구현한다는 취지는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도입과정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화재방호성능’을 고도화시키기 위해서 ‘성능위주설계’를 해야 한다는 본말이 전도된 논리가 이 제도 도입의 필요성으로서 중시되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성능설계’를 대상별로 ‘의무화’하게 되는 매우 특이한 법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소방엔지니어링 업계 일각에서도 성능위주설계는 ‘의무화’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망이 표출되었다. 일정 규모의 성능설계 시장이 법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는 한 과연 누가 성능설계를 발주하겠는가 하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의 ‘성능설계’ 규정은 범 세계가 지향하는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진전된 규제패러다임’으로서가 아니라 ‘규제강화’를 위한 추가적 규제조항의 신설이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는 성능설계요소의 포괄범위가 사실상 ‘소방법’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화재방호성능이 이른바 수동형과 능동형 시스템의 융복합으로 구현된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성능설계시의 가변적 요소가 능동형 시스템으로 제한된다는 것은 제도의 효과성 측면에서 매우 비합리적인 일이다.

일본의 경우 건축과 소방이 분리되어 있는 상황은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건축에도 성능위주설계 규정이 있으므로 화재방호설계 시행자는 ‘건축+소방시스템’의 패키지를 대상으로 성능설계를 지향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약을 느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성능설계 결과의 검증제도상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성능설계’를 검토한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은 물론이고 전문성과 책임이 요구되는 일이다.

따라서 제 외국에서는 통상 자격자에 의한 3자 검토라는 ‘설계감리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다만 건축사에 대한 설계책임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설계와 관련한 여타 기술자격의 개발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성능설계 검증기관을 지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서 전문기관의 검토를 거친 내용을 ‘위원회’가 확인하는 것으로 검증절차가 마무리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방본부 ‘성능설계 심의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별도의 검증을 위한 절차는 요구되지 않는다.

이상 범세계적인 통상적 사례와 비교하여 열거해 본 우리의 성능설계제도의 두드러진 특성은 안타깝게도 이 제도의 시행과정에서 그 공신력과 효과성을 극도로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타국의 시방기준과 국내기준의 격차가 큰 부분, 이를테면 제연이나 피난에 있어서 성능설계를 시행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우선 시방기준을 정비한 연후에 공학설계를 통하여 시스템의 효율성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

글로벌 기업이 국내에 건물을 짓는다든가, 국제 수준의 시설이 들어서는 경우 제 외국과의 안전도 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행자 의지에 따라 성능설계를 병행할 수는 있으나, 이것을 나라법으로 강제한다는 것은 재고의 필요성이 있다.

두 번째로 지적한 바와 같이 성능설계가 소방시스템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설계자 입장에서 보면 매우 치명적인 사항이다.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고급 기술자가 공학설계를 했는데, 비용대비 성능이 향상되었다는 판단은 모호한 반면, 투자 소요만 명확히 늘어난다는 것을 투자자가 과연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소방설계’는 합의된 수준의 방호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적의 경제적이고 효율적 시스템을 찾아내고 구성하는 기술업무이다. 다시 말해서 그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안전도를 높여 보려고 한 없이 투자를 유도해야 하는 직무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건축의 피난 및 방화시설과 소방시스템을 아우르는 화재방호설계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능설계가 그 의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검증절차의 차이점 또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문제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전문가’라는 타이틀과 ‘청렴객관성’이 보장되는 위원회만 거치면 행정적 하자는 없는 것이라는 편의주의적 발상은 시급히 교정되어야 한다.

심의위원들이 심의방향과 검증기준에 대한 컨센서스를 형성할 수 있는 사전 준비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설계검토작업이 ‘재능기부’수준의 무보수로 이루어지다 보면 심의의 일관성은 획득될 수 없으며 심의를 받는 당사자도 심의에 대한 불신과 당혹감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상호 소통이 어려운 가운데 심의절차는 날이 갈수록 권위와 행정편의주의만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운영방법상의 보완도 필요

여기까지 짚어본 내용은 주로 우리나라의 성능설계제도가 갖는 차별점에서 기인한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운영방법적 측면, 즉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보완을 서둘러야 할 사항들은 없을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몇 가지의 개선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성능설계 건물에 대한 사후관리제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공학적 계산에 반영된 설계요소들은 건물 준공 후에도 ‘성능보장’차원에서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도면이나 계산자료도 건물이 존재하는 한 공적으로 보관·유지되어야 한다.

추후에 개수가 필요한 경우 성능설계 당시의 평가요소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판단을 위한 인허가 과정이 요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는 성능설계를 시행한 건물이라하여도 건축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리모델링은 아무런 제약없이 시행할 수 있으며, ‘소방준공’에 있어서도 시방기준에 의한 판단만이 가능할 뿐이다.

두 번째는 다소 세부적인 사항인 공학적 해석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시뮬레이션을 시행함에 있어서 그 대상건물이 플랜트나 모델하우스와 같이 존치기간 중 lay-out의 변화가 없는 안정된 공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가연물의 배치상 변화가 심한 지극히 평범한 공동주택 등의 일상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비결정론적 모형을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금 침대가 있던 자리에 다음 해에는 어항이 들어설 수도 있을 터인데 설계자가 인허가단계에서 가구배치까지 고려해서 연소시뮬레이션을 시행하는 것이 단지 번거롭기만 할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보다 단순하고 명확한 공학계산이 추천될 수 있도록 설계자와 심의위원 그리고 인허가 기관의 컨센서스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최근 학술단체가 토의의 장을 개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운영체제와 관련하여 성능위주설계의 소관부서에 대해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상식대로라면 ‘성능위주설계’는 그 내용으로 봐서 국가화재안전기준과 소방시설설치유지에 관한 법률을 다루는 부서가 관할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능설계 규정이 공사업법에 포함되다 보니 ‘소방산업’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는 부서가 이 제도를 관할하게 되었다. ‘중앙소방기술위원회’도 소방시설 기준을 다루는 부서와 괴리되어 소방산업을 다루는 부서가 주무를 맡고 있다.

과연 이러한 ‘이례’가 제도운영상의 비효율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가 필요하다.

성능설계 본연의 자리 되찾아야…

기술정책이 일반정책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매우 엄격한 수준의 논리적 완성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기술논리는 그 자체가 오랜 검증과정을 거친 이론지향적이며 공고한 범세계적 공통성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자칫 서두르다 보면 정책자체의 정당성이나 타당성에 치명적 오류가 드러나거나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의 국제적 고립과 갈등을 자초하게 된다.

성능설계는 본래 기술과 문화가 급변하는 세상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솔루션을 찾아내어 현실과 접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진보적 규제이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면서 그 본연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잘못된 기술정책으로 기술자를 굴욕과 좌절, 당혹감에 빠트리고 산업계와 국가관리체제를 동시에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에서 ‘행정규제’라는 명분만으로 모순된 구조를 강요하다 보면 정부와 투자자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기술자는 그저 속죄양이 될 각오를 하거나 아니면 삶을 버리고 투자로 거듭날 수밖에 없다.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과 물방울 수영장을 세계인에게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능설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능설계제도는 중국 소방의 큰 자랑거리이자 현대화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40여 년 전 세계에서 최초로 또한 독자적으로 소방기술사 자격을 창출한 우리 소방이건만 정작 일류국가가 된 오늘날에는 한결같이 ‘안전논리’에만 매달려서 늦게나마 도입한 선진제도조차 활용하지 못하는 지경이라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와 달리 국제수준의 소방전문가가 소방기술계는 물론 소방공무원 중에도 다수 확보되어 있는 오늘날, 이제라도 소방기술인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귀한 씨앗을 제대로 틔우기 위한 만남을 갖는다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성능위주설계제도, 그래서 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자리를 찾는 길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소방방재학과 교수 윤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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