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공간 행정조치와 관련한 혼란이 멈출 줄 모르는 가운데 이번엔 통신피트실로 불리는 TPS공간에 분말소화약제를 사용한 자동식소화장치의 설치 가능 여부를 놓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여기에 소방방재청의 일관성을 잃은 행정과 관련 규정은 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난 2011년부터 소방방재청은 일명 피트공간으로 불리는 건축물의 일부 공간에 스프링클러 헤드를 반드시 설치하고 수손피해 등이 우려될 경우 대체 소화장치(가스식, 분말식, 고체에어로졸식, 캐비넷형자동소화기기)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행정지침을 운용해 오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건축물의 피트공간 중 전기ㆍ통신피트실(EPS, TPS)에는 스프링클러 헤드 보다 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하는 곳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두 공간 중 유독 통신피트실(TPS)에 분말소화약제를 사용하는 제품을 ‘설치할 수 있다’는 해석과 ‘설치할 수 없다’는 해석들이 엇갈리면서 현장 관계자들의 혼란과 반발을 사고 있다.
TPS공간은 Telecommunication Pipe Shaft의 약어로 통신용 케이블이나 BAS(자동제어용 케이블), HAS(홈오토메이션 케이블) 등 여러 종류의 통신 관련 전선이 수직이나 수평으로 통과되는 Shaft를 말하는데 건축물에서는 이러한 TPS실이 일반적으로 구획이 이뤄져 일정 공간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피트공간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이번 논란의 발단은 현행 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에서 분말소화약제가 통신기기실에 적응성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 때문이다. 여기에 일관성을 잃은 관련 법(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의 일부 규정들, 그리고 소방방재청의 민원 질의회신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일부 현장에서는 소방방재청을 통해 받은 질의회신을 근거로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건축물 설계에 반영했다가 준공 시점을 코앞에 두고 “설치하면 안된다”는 소방관서의 지도를 받아 막판에 가스식자동소화장치로 변경해야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일어났다. 더욱이 일부 건축물은 소방방재청의 질의회신을 근거로 이미 TPS실에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적용한 곳도 있어 자칫하면 위법행위로 몰릴 수 있는 황당한 상황에 놓여졌다.
현장의 한 소방기술자는 “통신피트(TPS)를 통신기기실로 봐야 한다며 분말식소화약제가 적응성이 없다고 일부 소방서가 해석을 해 문제가 됐고 이제는 소방방재청까지 혼란에 빠졌다”고 말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못 믿을 소방행정문제는 발단은 일관성을 상실한 소방방재청의 행정과 관련 규정들이다. 소방방재청은 과거 피트공간에 스프링클러 헤드를 설치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리면서 일부 자동소화장치들의 대체 설치를 허용했다.
이 과정에서 소방방재청은 스프링클러설비의 화재안전기준에서 ‘파이프덕트 및 덕트피트’에는 헤드설치를 제외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나 피트공간까지 확대 해석하면서 헤드 설치를 누락하고 있다며 이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밝혔었다.
또한 전기ㆍ통신피트실(EPS, TPS) 등 피트공간은 ‘통신기기실’이나 ‘전기실’ 등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스프링클러 헤드를 면제할 수 없다는 해석도 내린 바 있다.
▲ 스프링클러설비의 화재안전기준(NFSC 103)의 규정에는 파이프 덕트 및 덕트피트와 통신기기실, 전자기기실 등에 스프링클러 헤드의 설치를 제외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소방방재청은 지침 시행 당시 전기ㆍ통신피트(TPS, EPS)는 이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렸었다. 즉, 파이프덕트 및 덕트피트는 물론 통신기기실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 |
전기ㆍ통신피트실을 통신기기실이나 전기실로 해석할 경우 관련법에 따라 스프링클러 헤드설치가 면제되기 때문에 소방방재청의 이 같은 해석들은 피트공간에 무조건 스프링클러 헤드를 설치해야 한다는 행정조치의 핵심 내용이 됐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에 명시된 분말소화약제의 ‘통신기기실’ 적응성을 따지면서 통신기기실이 아니라던 통신피트(TPS)에 분말소화약제를 사용하는 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할 수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소방시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통신피트실을 통신기기실과 유사한 시설로 볼 수 없다던 소방방재청 최초 지침과 달리 최근에는 TPS나 층구내통신실 등 통신피트를 통신기기실로 분류하고 있다”며 “이는 과거 내려진 지침을 소방방재청 스스로가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균형 잃은 화재안전기준 규정일관성을 상실한 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도 문제가 되고 있다. 현행 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 별표 1(소화기구의 소화약제에 의한 설치장소별 적응성)에서는 통신기기실에는 분말소화약제가 적응성이 없다고 적시돼 있다.
하지만 별표 4(부속용도별로 추가하여야 할 소화기구)에서는 통신기기실에 유효설치방호체적 이내의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고시 내 규정에서도 서로 다른 내용이 상충되고 있어 법 규정 자체도 일관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NFSC 101) 별표 1에서는 분말소화약제가 통신기기실의 적응성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별표 4에서는 통신기기실에 분말식 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서로 상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 |
일관성 없는 행정에 놀아나는 현장소방방재청이 민원 질의에 답변한 내용은 일관성을 상실한 행정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2월 한 민원인이 소방방재청에 질의한 내용에는 “TPS실에 고체에어로졸 자동소화기를 대체할 수 있는 소화기구가 어떤 것이 있는지” 물었고 이에 대해 소방방재청 소방제도과는 “가스식, 분말식자동소화장치 및 캐비넷형 자동소화장치가 있다”는 답변을 내놨다.
또 지난 6월 민원에서는 “신축중인 건물의 통신기기실(TPS포함) 및 EPS실에 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하려 하는데 어떠한 것을 설치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질의에 소방방재청 소방제도과의 관계자는 “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하는 경우 고체에어로졸, 가스식, 분말식자동소화장치 모두 사용 가능하니 적절하게 선택해 시공하라”고 회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하면 안된다는 소방방재청의 최근 해석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의 답변들이다.
또한 소방방재청은 올해 2월 통신피트실과 통신기기실의 판단 기준을 묻는 민원 질의에 대해 “건축물의 용도에 따른 건축면적 및 연면적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 통신기기실로 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TPS실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해석도 내놓기도 했다.
이 역시 최근 소방방재청이 화재안전기준 규정에 따른 ‘통신기기실’의 적응성을 고려해 분말소화약제를 적용하면 안된다는 해석 자체와 상반되는 내용이다.
소방시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소방방재청의 질의회신 내용은 관할 소방관서의 행정과 밀접하게 연계되기 때문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된다고 했다가 안된다고 하는 식의 오락가락 해석은 담당 공무원들이 탁상에 앉아 현장 엔지니어들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밖에는 안보인다”고 비판했다.
자동소화장치 간 형평성 논란 확산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할 수 없다는 해석들이 난무하자 가스식자동소화장치와의 형평성 논란까지 불거져 나오고 있다.
▲소방방재청고시로 운용되고 있는 가스, 분말식자동소화장치의 형식승인 및 제품검사의 기술기준 | |
최초 피트공간에 대한 예고없는 행정지침이 내려지면서 당시 소방방재청 소방산업과는 전기 판넬 내부 등 소규모 소화장치로 사용되던 소공간소화장치(현재 명칭 ‘자동소화장치’)와 고체에어로졸 자동소화기의 기술기준(당시 KFI인정)을 가스·분말식, 고체에어로졸식 자동소화장치 등 두 가지 형식승인 기준으로 제정, 고시했다.
이 과정에서 소방산업과와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은 피트공간의 소화 적응성을 고려해 목재 및 중합재료, B급 등 체적 소화시험 방법을 강화하는 등 설치 대상에 적합한 성능을 갖춘 제품이 보급되도록 뒤늦은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현재 분말식자동소화장치와 가스식자동소화장치, 고체에어로졸식 자동소화장치는 동일한 시험을 통해 소화 성능를 검증받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개발한 제조사나 이를 설계에 반영하거나 적용하려는 기술자들은 소화 적응성이 없다는 관련 규정과 해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시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할 수 없다는 해석은 지침 이후 스프링클러 헤드 설치를 대체하기 위해 제정 고시한 형식승인 기준의 제정취지는 물론 기술기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제조하는 업계 관계자는 “제품의 소화 성능과 적응성은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을 통해 형식승인을 받아 검증을 받았는데 적응성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지난해 규정 개정 추진 무산, 이유가…
분말식자동소화장치 적응성 해석 논란은 화재안전기준에서 규정하고 있는 소화약제에 대한 적응성 기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4월 소방방재청은 통신기기실 소화적응성에 분말소화약제를 추가하는 내용의 소화기구의 화재안전기준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이 제기되면서 결국엔 개정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다.
본지에서 입수한 당시 의견조회 결과 보고 문건을 보면 해당 개정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한 곳은 한국소방기술사회와 분말식자동소화장치의 경쟁사인 고체에어로졸식 자동소화장치 제조사 1곳, 그리고 4건의 네티즌 의견이었다.
이 문건에서 한국소방기술사회는 “분말소화약제가 전기실과 통신실 등에 적응성은 있지만 2차 피해가 우려되기 때문에 적용을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고체에어로졸식 자동소화장치 제조사와 네티즌은 “NFPA코드 등 국제적 기준을 검토한 결과 전기실 및 전산실, 통신기기실에 대하여 적응성 없으며, 2차 피해 우려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으므로 적응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적응성은 있지만 2차 피해를 고려해 허용하면 안된다는 의견이다.
이러한 반대 의견을 수용하기로 한 소방방재청은 “NFPA 코드 등 국제적 기준에서 통신기기실 등에 분말소화약제의 사용자제를 권고하고 있고 전산실과 통신기기실은 유사장소로 볼 수 있지만 전기실 및 전산실은 소화난이도 및 소화방식 등이 유사하다고 볼 수 없기에 분류 체계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소방방재청은 소화약제에 의한 설치 장소별 적응성 연구용역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으면서 개정을 유보했지만 실질적인 연구용역은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분말 적응성 논란, 해결방안은 없나 분말소화약제의 통신피트실(TPS) 적응성은 소화약제 자체에 대한 적응성을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하는지가 관건이다. 소화약제의 적응성을 화재 진압 가능 여부만으로 판단할 것인지, 일각에서 제기하는 소화약제 방출에 따른 시설물의 2차 피해까지 고려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 통신피트(TPS)실에 설치된 분말식자동소화장치의 모습. | |
하지만 통신피트 내에는 대규모 통신기기실과 같이 정밀한 전자장비가 들어서기 보다는 통신 단자함과 같은 단조로운 시설만이 있는 장소라는 점을 고려할 때 2차 피해를 우려할 필요는 없다는 시각이 크다.
또 이미 A, B, C급 화재에 대한 적응성을 가진 분말소화약제를 두고 또다시 적응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타당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약제에 대한 소화약제 성능은 이미 검증된 것이고 분말식자동소화장치 또한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을 통해 형식승인을 받은 제품들이기 때문이다.
시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만일 분말식자동소화장치를 설치하는 공간에 2차 피해가 우려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건축물 관계자 등 소비자 입장에서 판단해야 하는 몫”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소화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2차 피해를 고려해 설치 대상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며 “가스를 쓰던, 분말을 쓰던, 강화액을 쓰던, 이러한 부분은 설치 대상을 관리하거나 설치하는 관계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선택권이 부여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논란이 불거지자 최근 숭실사이버대학교 소방방재학과 이창우 교수는 소방방재청에 문제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일각에서 제기하는 2차 피해와 관련해 미국 NFPA(코드 17)에서 규정하고 있는 분말소화설비 기준에서는 전자장비에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NFPA 규정에는 전자장비 또는 민감한 계전기 방호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기 전에 잔류 침전물이 전자장비 성능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분말소화약제가 장비에 미치는 영향 여부를 판단해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분말소화설비를 설치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분말소화설비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분말이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 적용가능토록 규정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숭실사이버대학교 이창우 교수는 “분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통신피트실에 대한 분말소화약제 사용을 허용해야 하고 화재안전기준도 개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미국과 같이 정밀한 전자장비에 사용할 때에는 2차 피해를 고려한 실험을 통해 영향 여부를 판단하는 등 소방기술사 등 엔지니어의 기술적 판단과 소비자 선택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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