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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을 안고 응급구조학과에 입학했지만 마주한 현실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2년의 공부와 임상 실습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니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 온 ‘외국 EMT’의 꿈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돈도 좀 모았겠다,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밴쿠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 ▲ 밴쿠버 LGBT 축제에 참여한 BCEHS 구급차 ![]() ▲ EMR 교육을 받은 강의실 겸 연습실. 편안한 분위기다. 캐나다(BC)의 응급구조사 등급 체계 캐나다는 의사가 병원 전 현장에서 활동하지 않는 대신 응급구조사가 넓은 업무 범위를 갖는 미국식 EMS 모델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는 다소 다른 응급의료 체계를 구축한 나라입니다.
다만 앞으로의 모든 내용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이하 BC)를 기준으로 작성됐습니다. 연방 국가인 캐나다 특성상 주(州)에 따라 응급구조사 제도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미리밝힙니다.
제가 머무른 밴쿠버가 속한 BC는 캐나다 안에서도 응급구조사의 업무 범위가 비교적 넓은 지역입니다. 우리나라의 응급구조사가 두 등급인 것과 달리 BC의 응급구조사인 EMA(Emergency Medical Assistants)는 5개 등급입니다.
이 중 BC의 CCP는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의사 없이 독자적으로 항공기에서 중환자를 이송하는 업무를 합니다.
제가 취득한 EMR은 시골 지역에서 근무하는 경우 BLS(기본 응급처치) 구급차의 주 처치자로 근무할 수 있습니다. 출동이 많은 도시권에서는 BLS 구급차에서 PCP를 보조하거나 병원 간 단순 이송 업무를 수행하는 등 역할 면에서는 우리나라 2급 응급구조사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에피네프린, 엔토녹스(일명 ‘웃음 가스’) 등 총 11개의 약물을 간접 의료지도하에 투약할 수 있는 등 업무 범위는 미국 EMT와 더 유사합니다.
EMR이 되기 위한 교육 EMR이 되기 위해선 120시간 내외의 교육을 수료한 후 BC주 응급구조사 면허시험원(EMA Licensing Branch)에서 시행하는 이론과 법규,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EMR 교육은 EMALB의 인정을 받은 교육 기관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전 ‘코스트 월더니스 메디컬 트레이닝(Coast Wilderness Medical Training)’이라는 사설 기관을 통해 교육받았습니다. 이후로 설명할 교육과정은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육은 온라인 사전 학습을 제외하고 14일간 진행됩니다. 교육생 17명을 강사 3명이 가르쳤으니 강사와 교육생 비율이 1:6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강사들은 모두 현직 PCP였고 단지 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실제로 현장에서 환자를 처치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교육은 매일 오전 9시에 ‘점프 키트(Jump Kit)’라고 부르는 응급처치 장비와 산소통, 교육용 AED를 교육생 스스로 점검하고 부족한 물품을 채우는 식으로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장비 조작법을 익히는 건 물론 장비 관리에 대한 책임감도 기르게 됩니다.
![]() ▲ 산소통은 ‘Zap Strap’이라는 붉은 끈으로 비 재호흡 마스크와 비강 케뉼라를 묶어 놓은 후 준비한다.
이후 그날 주제에 맞는 간단한 이론 강의가 끝나면 필요한 술기를 배우고 3~4명이 한 조가 돼 강사가 부여하는 시나리오를 연습하는 흐름이 오후 6시까지 4~5번 반복됩니다.
첫 수업부터 강사는 현장 평가와 안전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시나리오는 HEMP-ABC라는 줄임말을 사용해 현장 상황과 환자 상태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무리 짧은 시나리오나 술기 연습이라도 환자 혹은 마네킹의 몸에 접촉한다면 반드시 일회용 장갑을 착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장 안전, 감염 방지”라는 말로 모든 현장 평가 과정을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1일 차부터 7일 차까진 FR 업무 범위인 기본 응급처치를 배웁니다. 여기엔 에피네프린과 글루카곤, 날록손 등 약물 투여가 포함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응급구조사의 약물 투여가 활발하지 않고 1급 응급구조사 국가고시에도 전문심장소생술에 쓰이는 약물을 제외하면 적응증 정도만 출제됩니다. 하지만 캐나다에선 가장 기본적인 교육에서도 11개 약물의 적응증, 금기증, 용량, 경로, 주의 사항을 모두 외워야 하기에 학습 부담이 상당했습니다.
OPA, NPA 등 기본 기도 관리와 활력 징후 측정, 부목법과 지혈법 등 대부분의 술기도 이 기간에 배웁니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심폐소생술 등 일부 술기를 제외하면 교육과 시나리오에서 마네킹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교육생들이 돌아가며 환자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 ▲ 일회용 장갑이 쓰레기통에 쌓여있다. 개인보호장구 착용 습관화가 교육되는 현장이다. ![]() ▲ 외상 시나리오 현장 마네킹은 사람의 몸과 똑같지 않고 정상 소견을 가진 여러 사람을 실제로 평가해 봐야 현장에서 환자의 비정상 소견을 잘 구별할 수 있다는 게 강사의 설명이었습니다.
실제로 교육 내내 성별에 관계없이 교육생끼리 촉진, 청진 등 신체 검진이나 술기를 연습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문화 차이는 고려해야겠지만 환자 평가의 노하우를 쌓는 좋은 방법임은 틀림없습니다.
8일 차부터 14일 차까진 EMR에서 추가되는 업무 범위를 배운 뒤 대량 재해, 응급 분만 등의 심화 학습과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최종 평가를 치릅니다.
4종의 약물을 추가로 배우는데 더해 NEXUS 기준에 따른 척추 움직임 제한, 환자 평가 결과에 따른 이송 중증도 분류, 의식 저하 환자의 원인 감별 등 임상적 추론과 의사결정을 필요로 하는 시나리오를 진행합니다.
11일 차엔 실제 현장과 거의 비슷한 시뮬레이션 시간을 가집니다. 평소엔 강사가 부여한 상황을 바탕으로 가상의 환자를 처치하는 연습을 합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강사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상의 활력 징후조차 제시하지 않습니다.
중증 외상 환자처럼 분장한 강사에게 평가, 처치, 이송 등 모든 과정을 교육생들만의 판단으로 온전히 수행합니다. 한국에서도 실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환자를 처치하는 훈련은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처치보단 허둥거린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교육과정 전체에 걸쳐 꾸준히 반복해 온 시나리오 연습은 환자에게 해야 할 처치를 몸에 각인시켰습니다. 어느덧 자연스럽게 환자 옷을 자르고 투여할 약물을 판단하는 저와 동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 시뮬레이션 시간. 강사들이 환자 역할을 한다.
12일 차의 경험은 꼭 나누고 싶습니다. 수업은 효과적인 CPR에도 ROSC가 되지 않는 시나리오로 진행됐습니다. 시나리오 후 강사는 소생술 중단과 보호자에게 사망을 알리는 방법, 태도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그 뒤 강사가 해준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망자와 가족도 돌봐야 하지만 여러분 자신도 돌봐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죽음에 노출되는 건 일반적인 사람이 겪는 일이 아닙니다. 슬프거나 화나는 반응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환자를 살릴 순 없습니다. 여러분의 손에서 벗어난 일들도 있습니다. 이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다면 반드시 상담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문득 첫 임상 실습을 할 때 제 손에서 사망한 환자가 떠올랐습니다. 2년이나 응급구조학을 공부했지만 교수님도, 실습 지도 선생님들도 이런 일이 생긴다는 말은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앉아 내 처치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곱씹으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EMS 기초 단계에 해당하는 교육부터 죽음을 다루고 자신을 돌보는 방법까지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꼭 우리나라에도 도입되길 바랍니다.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교육받으며 느낀 점은 기초의학 등 문헌적 지식 면에서 우리나라 응급구조학 교육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혼자서 다른 응급구조사들을 통솔하며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처치하는 데 필요한 판단력 훈련에서는 월등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임상 실습은 관찰이나 단편적인 술기 위주의 수행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급차 동승 실습에서도 주 처치자의 역할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시뮬레이션 실습 역시 대본이 있는 연극식 수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졸업할 때가 돼도 ‘과연 환자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놓지 못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다양한 환자 시나리오를 접합니다. ‘정답’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내린 판단을 믿고 처치하는 연습을 반복합니다. 그 판단이 환자에게 최선임을 합리적 근거를 통해 설득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면 가이드라인에서 조금 벗어난 처치도 용인됩니다.
이 과정을 거친 교육생들은 기계적 암기와 원칙의 적용을 넘어 무엇이 환자에게 최선일지 고민하는 태도와 판단력, 자신감을 갖춘 응급구조사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병원 전 처치의 기틀, 환자 평가 모델 교육 전체에 걸쳐 반복하는 시나리오 실습은 환자 평가 모델을 숙지해 적용하고 환자 상태에 따라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을 연습하는 과정입니다. 환자 평가 모델은 응급구조사가 환자를 평가하고 처치할 때 따르는 흐름입니다. 우리나라와의 차이를 중심으로 BC 환자 평가 모델을 살펴보겠습니다.
현장 평가에서는 구체적으로 현장 상황과 위험 요소를 확인해야 합니다. 가령 겨울철 방갈로에서 두통과 의식 저하로 신고가 들어왔다면 일산화탄소 중독의 위험은 없는지, 환기가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불확실하다면 반드시 소방 지원을 요청해야 하고 일산화탄소 감지기를 착용함을 언급해야 합니다. 이어 환자 상태를 대략으로 파악한 뒤 파트너에게 임무를 부여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손상과 질병을 처치하는 일차 평가는 AVPU 단계로 의식 수준을 평가하며 시작됩니다. 만약 환자가 무의식 상태라면 심정지를 배제하기 위해 이후 단계를 CAB 순서로 시행합니다.
경추 고정은 손상 기전과 환자 의식 상태를 고려해 선택적으로 시행하되 척추 손상이 명백하면 의식 확인 전부터 도수 고정을 시작합니다.
기도와 호흡, 순환은 모두 합쳐 45초 이내에 평가합니다. 기도 문제라면 도수 기도 개방, 호흡 문제라면 산소 공급, 앉은 자세 취해주기, 쇼크 의심 시 누운 자세 취해주기 등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처치해야 합니다.
RBS는 머리부터 다리까지 전신을 빠르게 촉진ㆍ시진하며 이상을 찾는 단계입니다. 이때 발견되는 손상은 즉시 지혈과 골수 부위 도수 고정 등으로 처치합니다.
SOAP 단계에서 가장 먼저 평가하는 피부는 쇼크 등 순환계의 상태를 확인하는 지표가 되므로 중요합니다. 손등을 이마에 대고 피부의 색, 습기 온도를 평가합니다. 이어 산소포화도를 평가한 후 필요하면 산소를 공급하고 기도기를 삽입하거나 환자 상태에 맞는 자세를 취해줍니다.
여기까지의 평가 결과에 따라 빠르게 이송할지, 현장에서 이차 평가까지 마칠지를 결정합니다. 불안정한 환자는 15분 이내에 일차 평가만 끝내고 이송을 시작하는 게 원칙입니다. 평가 결과에 따라 즉시 시행해야 하는 처치를 ‘필수 처치(Critical Intervention)’라고 부릅니다.
중증 외상 환자의 척추 움직임 제한이나 내과 환자에게 필요한 에피네프린, 포도당 등의 약물 투여, 뇌졸중 의심 환자에 대한 FAST-VAN 검사 같은 일부 평가도 포함됩니다.
불안정한 환자라면 구급차 내로 옮겨 이송 중 이차 평가를 시작합니다. 먼저 병력을 청취한 뒤 활력 징후를 평가합니다. 침습적 처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혈당은 당뇨 병력이 있거나 의식이 저하됐을 때만 측정하고 체온도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반복 측정하지 않습니다.
불안정한 환자, 특히 중증 외상 환자의 경우 이송 시작 전 현장에서 활력 징후를 측정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골든아워를 불필요하게 허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활력 징후와 환자 상태에 따라 필요하면 경구용 또는 흡입용 진통제를 투약하고 병원에 사전 연락합니다. 만약 안정적인 환자라면 골절 등이 있더라도 정밀 신체검사까지 모두 마친 후 부목을 적용하고 이송을 시작하게 됩니다.
재평가는 환자 평가 모델의 전 과정에 걸쳐 매우 중요시됩니다. 불안정한 환자는 5분마다, 안정적인 환자는 15분마다 재평가해야 합니다.
환자를 움직인 경우나 의식 상태가 변화한 때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단지 활력 징후 측정을 반복하는 것뿐 아니라 기도, 호흡, 순환과 수행한 처치에 변화가 없는지를 자세하게 확인하는 게 필수입니다.
임은재 : 2ndrespond@gmail.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6년 3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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