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형! 우리가 소방서를 함께 그만둔지도 벌써 37년이 지났군요. 강산이 세번 변하고도 남는 세월입니다. 그 사이에 동안이었던 얼굴에는 나도 모르게 깊은 주름이 패였고 머리에는 백설이 덮였습니다.
37년전. 미군이 쓰다버린 gmc트럭을 개조해 만든 소방차 꽁무니에 매달려 신나게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던 일. 유난히도 춥던 겨울밤에 화재 현장에서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일.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눈에 선합니다.
그래도 그때 우리는 이것을 천직으로 알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지요.
그러나 그 당시 소방업무는 경찰산하에 예속되어 있어서 3.1절 4.19. 5.16을 비롯해서. 광복절. 추석. 신정. 구정에 이르기까지 경찰이 비상근무를 할 때면 우리도 어김없이 비상근무를 해야했지요.
그 뿐이던가요? 데모진압 현장에도 경찰과 같이 투입돼서 데모 군중들에게 물감을 뿌려야 했지요. 그런 연유로 해서 6.3사태 때는 소방서로 몰려든 데모 군중들의 돌팔매질로 유리창이 하나도 안남고 다 깨져 버렸죠. 그런 와중에서 우리 직업에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l형과 내가 소방서를 함께 그만 두었지요.
l형! 형은 소방서를 그만둔 후 미련 없이 소방계를 훌훌 떠나 버렸지만 나는 그 동안 소방설비 공사업에 종사하면서 어언37년이 지났습니다. 영세 업종인 소방설비 공사업에 종사하면서 그 동안 말할 수 없는 괴롭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후 소방인 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내 손으로 설치한 소방시설에 의해서 수십 명의 귀중한 생명과 수천억원에 이르는 재산들이 화재로부터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을 확인했을 때는 솟아오르는 기쁨과 긍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지요.
이런 보람된 일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소방업계에 머물렀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보람있던 일 중에서 몇 가지를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소방설비 공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몇 년 후의 일 이였습니다. 서울 b동에 있는 연건평 500여평의 5층짜리 복합건물에 소방설비를 시공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건축주로부터 “저녁에 좀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며칠전 화재가 났다는 것입니다. 황망한 마음에 상황을 더 물어볼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혹시 소방시설이 제대로 작동이 안되었나?”하는 불안감속에서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건축주는 뜻밖에도 밝은 얼굴로 반갑게 맞아 주면서 “소방시설을 잘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면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 며칠전 3층에 세 들어 있는 봉재공장에서 젊은 공원 다섯 명이 밤늦도록 야근을 끝낸 후 술들을 마시고 전기다리미의 플러그를 그대로 꽂아 놓은 채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고 합니다.
과열된 다리미가 흩어져있는 양복지들을 태우고 간막이 커텐으로 옮겨 붙어 불길은 천장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화학섬유가 타면서 발생된 연기에 질식되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천장으로 올라간 불길은「자동화재탐지기」를 작동시켜. 새벽 2시경. 고요한 적막을 찢는 경종소리에 놀란 이웃 사람들이 뛰쳐나와 진화작업을 한 덕분에 화재는 초기에 소량의 피해로 그쳤다는 것입니다.
연기에 질식됐던 공원들도 병원에서 응급치료 후 모두 깨어났다고 합니다. 피해부분은 세 들어 있는 봉재회사 대표가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면서 즉시 복구를 해 놓았는데 화재보험회사에서는 보험회사대로 보험금을 내 주어서 오히려 돈을 벌게 되었다고 고맙다는 것이었습다.
“화재경보기가 작동 않했으면 다섯 명의 인명피해를 내는 큰 화재로 발전해서 정말 큰일 날 뻔했다”면서 극구 치하하는 건축주 앞에서 귀중한 인명의 희생을 미연에 막았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그 후로 몇 년 뒤에 p시에서 영업을 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n의료기 회사」에 설치된 자동화재 탐지설비에 대한 전반적인 정비 및 보수를 도급 받아 시공했는데 시설이 너무 노휴 되었고 정상적인 관리를 하지 않아 배선은 단선 상태인데다가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 불량한 상태였습니다.
노후된 시설은 새로 교체하고 끊어진 배선은 이어가면서 한 회로. 한 회로를 정성 들여 일주일만에 정비공사를 완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가 초겨울이었는데 밤 12시쯤 되면 자동화재 탐지시설의 화재경보가 요란스럽게 울려서 경비요원들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가 보면 화재가 발생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사를 부실하게 했길래 이렇게 오작동이 나느냐?” “x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밤12시에 소화기를 들고 뛰어다니게 만드나?” “화재 경보기를 당장 없애던지 해야지 더러워서 경비원도 못해 먹겠다” 경비원들의 원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회사의 기술요원들을 모두 동원해 오작동의 원인이 됨직한 문제점을 세밀히 점검했지만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일주일 동안「n의료기 회사」로부터 항의와 “빨리 고쳐 내라”는 독촉이 자심 했습니다.
8일째 되던 날. 나는 직접 현장에 나가 상황을 체크해 보기로 결심하고 공장장과 같이 시설을 점검해 나갔습니다. 먼저 경비실에 수신기를 체크하면서“화재경보가 울릴 때 어느 회로 표시등에 불이 들어오는가?”를 물어봤더니 「3번 경계구역」에 불이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공장장과 같이 「3번 경계구역」의 시설들을 하나 하나 점검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이르니 목재로 준 2층다락방을 만들어 놓은 것이 눈에 띄었는데 사다리로 올라가 보니 한 20평쯤 되는 마루에 매트리스가 깔려있고 한편에 침구가 놓여있었습니다.“지방에서 온 공원들을 임시로 재우는데 15명서부터 20명까지 재운다”고 공장장이 말해주었습니다.
다락방 마루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5미터쯤돼 보이는 아주 낮은 높이였는데 그때 문뜩 마루 위에 놓여있는 석유 난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에 차동식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 무엇인가가 번쩍. 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밤이면 저 석유난로에 불을 지피느냐?”고 물었더니“절대로 사용한 적이 없다”고 그곳에 있던 공원들이 합창하듯 대답하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공장장을 보고 말했습니다.
“오작동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요즘 날씨에 밤 12시쯤 되면 추위 때문에 저 석유난로에 불을 피웠을 것이고 천장으로 올라간 열기에 저 감지기가 동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는 단언하면서“이 정도에서 발견된 것이 다행입니다.
만일 피곤에 지친 공원들이 잠결에 석유 난로를 걷어차 쓰러지게 될 경우 20여명의생명은 화마에 희생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저 난로를 치우시지요. 나는 이 감지기의 감열 부분을 분리해서 화재감지의기능을 정지시키겠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다시 오작동 소동이 있으면 공사비 전액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 날 이후 열흘이 지났어도 오동작이 발생했다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공장장을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이하면서 몇 번이고 그 동안 미안했다는 말과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당장 새 기숙사를 마련 하기로 했지요. 소방시설을 정비한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하고 소방시설 예찬과 함께 극구 치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l형! 어느새 밤이 깊었나 봅니다. 오늘은 이 두가지 애기만 전해드리고 앞으로 종종 재미있는 내용들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에 조심하시고 종종 근황에 대해 소식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사연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