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항공기의 역사(1940년대 - 제2차 세계대전, 유럽 대서양) 1940년대의 항공 기술 발전은 현대 항공 기술 수준까지도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을 만큼 항공기 개발이나 생산, 활용 모든 면에서 전성기였다.
과거 항공기 발전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마찬가지로 전투기 개발과 생산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각국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필수 요소 중 하나가 제공권과 제해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각국은 국가적 침략ㆍ침공을 대비해 항공을 포함한 전반적인 군수 산업을 장려했다. 특히 미국과 영국, 독일, 일본은 군용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개발ㆍ생산한 국가들이다.
그 이유와 개발된 군용기에 대해 살펴보려면 먼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상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후까지의 각국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국인 3국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은 전쟁 후유증에 대한 타격이 매우 컸다. 특히 독일은 3국 동맹국 중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됐기 때문에 1919년 6월 승전국인 프랑스에서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440개 조항)을 맺으면서 굴욕적인 대가를 치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들은 독일에 패전의 대가로 식민지국 몰수와 독일 연간 예산의 약 20배에 달하는 1320억 마르크를 전쟁 배상금으로 요구하고 군대 규모를 10만명 이하로 축소하는 걸 강요했다.
다신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전투기와 잠수함, 포병 화기의 개발ㆍ보유까지 금지하는 등 군비 제한 조항도 넣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독일인의 자부심을 짓밟고 굴욕을 안긴 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동부 영토(약 15%)를 넘기고 서부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을 강제해서다.
많은 독일인은 전쟁의 책임이 다른 나라에도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독일만 가혹하게 벌을 받는 듯한 상황이 지속되자 패전의 상처가 아물긴커녕 오히려 주변국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독일은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화폐를 찍어내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1929년 검은 금요일이라고 불리는 세계 경제 대공항까지 겹치면서 실업자가 수백만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나치(Natiomalsozialismus, 민족 사회주의) 당이 집권하자 독일의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가장 먼저 유럽 정복과 아리아인(게르만족)의 번영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워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민족의 유대감 형성을 위해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해 최고 민족(아리아인)을 만들자는 우생학과 인종주의(racism)를 선동하며 뉘른베르크 인종법 등 독일 내 인종을 차별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차별을 가장 많이 받았던 대상은 바로 유대인이다. 당시 유대인은 자신들만 특별하다는 선민사상과 더불어 주로 중개무역이나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축적해 유럽 전역에서도 시기와 차별의 대상이었다. 그런 유대인을 절멸하는 걸 공약으로 내건 정당도 많았다.
특히 독일을 집권한 나치당은 유대인들이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화된 소련에 영향을 줬다고 믿었다. 실제 독일 내 공산당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대인들이 적지 않아 자신의 정권에서 위협이 될 거로 생각했다.
이렇게 반공주의와 인종주의를 앞세워 국민을 통합하고 지지를 받은 히틀러의 나치당은 경제적 안정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군수 사업과 아우토반 건설 사업 등 각종 산업에도 직접 개입해 일자리를 만들어나간다.
이미 1920년대부터 군용기와 잠수함(유보트) 등 극비리에 무기개발을 추진해 온 독일은 1935년 군비 제한 조항을 폐기하는 등 본격적으로 주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사력 강화를 위한 폭격기와 전투기, 전차 등의 재무장을 선언한 후 무기개발을 시작한다.
1935년 이전 독일은 항공기 약 2천대를 보유(군용기 약 590대)했으며 1935년 1월 이후 전투기를 한 달에 160대 이상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상태였다. 조종사 또한 레저 산업을 가장한 청소년 글라이드 클럽으로 양성하고 있었다.
군비를 증강한 독일은 1938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를 안슐러스에 강제 병합하고 옛 영토와 자존심을 되찾고자 1938년 10월 1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다는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을 비롯한 주변 연합국은 제1차 세계대전 같은 비극적인 참호전의 재발을 막고자 1938년 9월 29일 뮌헨에서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수데테란트(Sudetenland)를 합병하는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그에 따라 뮌헨 협정에 서명까지 하게 되지만 독일은 유럽의 패권 국가가 되기 위한 야망을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도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바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경우 동부의 인접 국가인 소련에서 이를 빌미로 개입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에 의해 전선(戰線)이 동부와 서부 양쪽으로 확대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독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향후 서로 10년간 침공을 하지 않겠다는 독소조약(독일 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된다.
그 후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6년간의 긴 전쟁에 서막을 올리게 된다. 당시 독일의 주요 침공 전략은 제공권 장악 후 폭격기를 이용, 적지 철도와 도로, 다리, 터널 등을 파괴해 적의 병력 이동과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군은 철도에 얽매이지 않은 기갑 등 무장부대로 기습하는 전략의 전격전을 주로 사용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영국과 프랑스 또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군(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폴란드)을 결성한 후 독일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곧장 진격할 거로 예상하고 대비한다.
하지만 독일은 폴란드 전역에서 전쟁 물자 준비와 전력을 보충하는 소강상태를 지속한다. 긴장감이 완화된 사이 독일은 1940년 4월 9일 무기생산에 필요한 철과 북쪽 국경의 발트해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하기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 순으로 침공한다.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연합군의 예상과 다르게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이 맞닿는 숲길 아르덴 지역에 기습적인 진격(낫질 작전, Sichelschnitt)으로 벨기에와 프랑스까지 단숨에 몰아붙여 연합군을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가에 내몰아 포위한다.
이에 영국군은 연합군 전멸을 우려해 덩케르크에서 영국 본국까지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다이나모 작전)을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독일군과 피할 수 없는 공중전(dogfight)이 벌어진다.
다이나모 작전에서 영국군은 고립된 수많은 연합군(약 34만명)을 철수시키면서 전술적으로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축함 19척과 선박 200척, 차량 5만여 대(전차 포함) 파손, 전투기 177대(영국 106대) 격추 등 피해가 막대했다. 독일도 전투기 240여 대가 격추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프랑스를 점령하며 전략적으로 승기를 잡은 건 결국 독일이었다.
당시 항공전에서 영국 우위의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영국공군 전투기 사령관 대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1882~1970)의 다우딩 시스템(Dowding system, 세계 최초 지상관제 요격시스템) 설계다.
체인 홈이라고 불리는 레이더 기지를 활용한 방공망 구축으로 영국은 100mile 떨어진 내륙까지 조기에 독일 전투기 침공 규모와 경로를 탐지함으로써 적절하게 긴급 전투 대응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격추당하면 포로로 잡히거나 구조될 수 없었던 독일 전투기와 달리 영국 전투기는 격추당해도 본토에서 조종사를 구조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사실 영국은 세계 최초의 레이더 방공망을 구축했음에도 본토항공전 초기엔 독일에 상당히 고전했다.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8월 15일 독일군이 강행한 총공격에서도 본토가 큰 피해를 본다. 그러나 독일 또한 생각보단 거센 영국의 반격에 큰 손실이 발생해 이러한 영국 내 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본토 항공전의 양상은 1940년 8월 24일 독일이 영국의 산업 시설에 대한 야간 전략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런던 시가지에서 오폭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독일 폭격기가 런던 상공을 지나는 도중 대공포화를 받게 되자 급히 폭탄을 버려 결국 9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영국도 독일 베를린에 야간 공습을 시도해 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보복 공습을 하게 된다. 대공망이 뚫려 본토를 공격받은 독일은 놀라게 되고 오히려 이를 빌미로 1940년 9월 7일부터 1941년 5월 21일까지 무려 영국 주요 도시에 민간에 대한 폭격을 포함한 강력한 대공습을 강행한다.
대공습 기간 중 런던은 무려 57일 동안 71회나 공습(야간 포함)을 받았다. 조종사의 시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항법에서 독일이 보이지 않는 야간에 대공습을 수없이 강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니켈 바인3)이라는 무선 전파 항법 시스템 활용 덕분이었다.
독일이 시가지 대공습에 집중하는 동안 영국은 군사시설 공격을 피해 신속하게 재정비하며 항공전 방어 태세를 더욱 견고히 한다.
전면전에서 대공습(야간 포함)으로 작전 비중을 변경한 독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면전으로는 영국의 견고해진 본토 방어를 뚫기가 어려워졌다. 70만 병력을 영국본토에 상륙시키는 바다사자 작전은 연기를 거듭하고 결국 포기하게 된다.
영국본토 항공전이 끝나고 독일과 영국 모두 경험 많은 조종사를 잃었음은 물론 물적 자원 소모와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맞게 된다.
게다가 영국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병력이 겨우 빠져나오느라 물자와 무기를 프랑스에 두고 왔기 때문에 사실상 영국본토에서 제대로 무장 가능한 병력이 2개 사단 정도뿐이었다.
무기가 필요했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55) 총리는 영국본토 항공전이 한창일 때부터 중립국인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933~1945) 대통령에게 지속해서 무기 지원 도움을 요청했다.
고심을 거듭한 루스벨트는 마침내 연합군의 무기를 지원하는 ‘무기대여법’을 제정하고 1941년 3월 11일부터 무상으로 무기 지원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독일은 지속적인 전쟁을 위한 물자(석유, 식량 등)를 확보하기 위해 또 다른 주변 국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이 점령 통치하던 북아프리카와 소련의 원유 생산시설 등 천연자원이 그 예다. 결국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불과 약 2년 만에 파기하면서 1941년 6월 22일 소련 기습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한다.
1) 덩케르크 철수(dunkirk, 1940. 5. 26.~1940. 6. 4.): 72㎞에 이르는 프랑스의 서쪽 해안 덩케르크부터 영국본토까지 영국군이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 구출(33만8226명)에 성공한 작전(일명 다이나모 작전, Operation Dynamo)이다. 다이나모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독일의 갑작스러운 공격 중단, 전투기를 운용하기 어려웠던 날씨, 860여 척에 이르는 군ㆍ민간 선박 동원 등을 꼽는다. 이후 연합군은 항전 의지를 되살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대반격을 할 수 있었다.
2) 영국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 1940. 7. 10.~1940. 10. 31.): 독일이 영국과의 해협 전투에서 우위를 점한 후 영국본토까지 침공하면서 일어난 전투다. 당시 영국은 체계적인 방공망 구축으로 독일의 접근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전투기도 월 496여 대(1940. 7. 기준)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독일의 침공에 방어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전투기 손실이 발생해도 영국은 조종사와 기체 일부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독일은 포로로 잡히거나 기체를 회수할 수 없어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해졌다. 이후 독일은 전면전인 항공작전을 중지하고 니켈바인 시스템을 이용한 야간 대공습으로 변경한 후 마침내 영국본토 상륙을 포기한다.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의 전투기 손실은 1547기, 독일은 1887기다. 양국의 주력 전투기는 Supermarine Spitfire MK1a(손실 403기)와 BF109(손실 610기)였다.
3) 니켈 바인(Knickebein):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영국에 야간 폭격을 위해 사용한 무선 전파 항법 시스템으로 ‘삐뚤어진 다리’라는 의미가 있다. 니켈 바이는 독일의 전기ㆍ전자 회사인 C. Lorenz AG에서 항공기 블라인드 랜딩 무선항법 시스템으로 1932년 개발한 로렌츠 빔(Lorenz beam) 시스템을 활용했다. 항법 중 2개(dash, dot)의 다른 신호 라디오 전파를 폭격할 목표물 위치까지 좌ㆍ우측에 지속해서 송신함으로써 항공기가 가운데서 두 가지의 신호음을 모두 감지하며 진행할 경우 목표물에 정확히 도달할 수 있는 원리다.
서울 서대문소방서_ 허창식 : hcs119@seoul.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2년 1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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