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속, 부서진 차량 안, 차가운 바닥 위. 늘 누군가의 하루가 끝난 자리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절망과 상실, 그리고 말로 다 담기지 않는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출동이 반복될수록 그 장면들은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쌓였고 겉으로는 무심한 듯 보여도 그 무게는 조용히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언젠가 그것이 삶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걸.
어느 날 거울 속 낯선 얼굴과 마주했다. 굳어버린 표정, 짧아진 말투, 희미해진 웃음. 예전에는 울음이 목까지 차오르던 순간들이 이제는 기계처럼 흘러갔다. 그것을 성장이라 믿고 싶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조용한 두려움이 자라났다.
혹시 무감각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여전히 사람일 수 있을까. 하지만 현장은 생명을 구하는 법만 가르쳐 줬을 뿐 자신을 지키는 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의식들을 만들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하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 새로 배운 노래, 친구와 다툰 일들. 그런 이야기들이 어깨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줬다. 시시한 농담에도 일부러 크게 웃었다.
웃음이 집 안 가득 번져갈 때만큼은 단순히 아빠이자 남편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가족의 목소리와 웃음이 굳게 닫힌 마음을 두드려 다시 온기를 불어넣어 줬다.
그러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샤워 중에도 현장의 장면이 문득 떠올라 사이렌 소리와 비명, 차가운 바닥에 남아 있던 체온, 그날의 냄새까지 불청객처럼 스며들었다. 물줄기 아래에서 한동안 꼼짝 못 한 채 숨만 고른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문틈 너머로 들려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절실했다. 그 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마음속 따뜻함을 확인시켜 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혼자만의 고요도 필요했다. 출근 전 차 안에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 마주할지도 모를 장면들을 마음속에 그려보며 그 순간의 나를 미리 준비했다.
몇 분의 침묵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의식이었다. 그 시간이 없던 날에는 더 쉽게 흔들릴 것 같은 불안이 몰려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오늘도 나를 잃지 말자”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사람답게 살아남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현장은 매번 시험대였고 절망과 상실이 반복되는 가운데 무너지지 않으려 이 작은 의식들에 기대었다. 가족의 웃음, 혼자만의 고요, 그리고 서서히 단단해진 내면이 나를 붙잡아 줬다.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어떤 날은 감정이 뒤늦게 밀려와 한밤중 홀로 깨어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작은 반복들이 다시 집으로, 그리고 본래 자리로 이끌어 준다.
오늘도 그 의식들을 이어간다.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일도, 사람답게 살아남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인천 계양소방서_ 김동석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10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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