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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사막 장미 대문 앞 쓰레기 더미에 화분이 처박혀있다. 꼴이 버려진 화분 같다. 화분은 작고 메마른 나무를 보듬고 있다. 나무보다 황토색 화분이 맘에 들었다. 가져와 4층 베란다에 뒀다. 카메룬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잘 보이는 곳이다.
소방관은 격일 근무라 공부할 시간이 많다고 해서 1994년 봄 시험을 쳤다. 발령을 기다리면서 신문의 한 귀퉁이에 세로로 적힌 작은 기사가 눈에 띄었다. 영등포 내셔널 플라스틱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 한 명이 순직했다는 기사였다.
‘허귀범’.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순직 소방관이다. 영등포소방서를 지원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영등포가 익숙한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1994년 11월 7일부터 소방관으로 일했다. 임시직으로 선택한 이 일이 평생 직업이 될 줄 몰랐다.
허송세월하다 때를 놓쳤다. 딱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눌러앉게 됐다. 2000년 초반 응급구조사 2급 양성 과정을 마치고 서부소방서 구급대원으로 일하게 됐다. 당시 서울 서북쪽 은평구와 서대문구를 담당한 소방서다. 지금은 은평소방서와 서대문소방서가 나눠 맡고 있다.
2001년 3월 4일 새벽 홍제동 참사가 일어났다. 서부소방서 소방관 여섯 명이 죽었다. 소방장 박동규, 소방교 박상옥, 소방교 김철홍, 소방교 김기석, 소방사 장석찬, 소방사 박준우. 순직자 네 분과는 같은 소방 파출소(현 119안전센터)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구조대 김기석 소방관은 대학 선배였다. 무너진 주택에서 구조된 박준우 소방관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를 꽉 물고 죽어서 입이 벌려지지 않았다. 한참 세월이 흘러 홍제역 3번 출구에서 고은초등학교까지 이어진 거리가 고인들을 기리는 소방영웅길로 지정됐다. 고인들의 희생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119구급대에 자동제세동기(AED)가 처음 배치된 게 2001년 3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부소방서 갈현 소방파출소 구급대원이었을 때 자동제세동기를 가져온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1400만원요? 구급대에 이런 비싼 기계는 필요 없어요. 이걸 어디에 쓰겠어요?”
처음으로 밝히는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때 구급대원으로서 내 수준이 딱 이랬다. 제세동기는 오랫동안 구급차에서 자리만 차지한 기계였다. 구급대원들은 현장에서 혈압이나 맥박 같은 바이탈 사인(Vital Signs)을 재지 않았다. 그저 기본 심폐소생술과 기본 외상 처치가 전부였다.
구급 소모품도 너무 없었다. 산소 투여 콧줄(Nasal Cannula)도 생리식염수에 씻어 여러 번 써야 했다. 환자 처치는 김장용 비닐장갑을 끼고 했고 병원에 환자를 인계하면서 콧줄이나 산소마스크를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때론 퉁명스러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서부소방서 구급대원으로 14개월 정도 일하다 2001년 7월 2일 미국에 구급대원(EMT) 연수를 가게 됐다.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 피츠버그(Pittsburgh)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응급의료 서비스(EMS) 교육ㆍ연구기관인 Center For Emergency Medicine(CEM) 6개월 과정이었다.
먼저 이론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영어라는 언어 장벽이 전국 소방서에서 온 한국 연수생들을 가로막았다. 일정 영어 점수가 선발에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구급 전문 교육을 소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2급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았고 현장 경험 덕분에 그럭저럭 쫓아갈 수 있었다.
하루는 구급 강사 존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가 있던 교실로 들어왔다.
“World Trade Center가 무너지고 있어!”
평소 익살맞고 장난기 많은 존이 농담한다고 생각했다. 이론 과정 중에 며칠간 휴가가 있었고 피츠버그에서 뉴욕까지 9시간 동안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뉴욕 배낭여행을 다녀온 지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그때 가본 뉴욕 맨해튼 쌍둥이 빌딩은 정말 엄청난 크기였다. 전망대 꼭대기 층에서 본 뉴욕의 야경도 멋졌지만 밑에서 본 110층 빌딩의 웅장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곳이 테러로 불타고 있다니!
영화적 상상력으로도 생각하기 힘든 비현실적인 뉴스가 CNN 속보를 타고 있었다. 2001년 그해 11월 9일, 뉴욕 World Trade Center 테러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방관도 300명 넘게 희생됐다.
25년이라는 세월은 퇴색과 왜곡, 미화로 기억을 덧칠한다. 그래도 어떤 기억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이론과 실습 교육을 마치고 병원 구급차 동승 실습을 했다. CEM 지척에 있는 피츠버그 대학병원(UPMC)에서 했다.
병원 실습은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바쁜 응급실에서 챙겨주는 사람 없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눈칫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실습보단 견학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건질 건 있었다. 구급대 현장 동승 실습은 훨씬 나았다.
한국 연수생들 숙소인 Point Park College 기숙사와 가까운 ‘Medic 14’에 배정됐다. 피츠버그 구급대는 소방서와 별개였다. Medic 14 직원들이 같은 구급대원이라고 잘 챙겨줬다.
실습 첫날 두 번째 출동에서 할머니 환자를 처치하는 파라메딕(Paramedic)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독거노인인지, 가족들이 자리를 비웠는지 할머니는 혼자였다. 대원들이 주 들것에 옮길 때 할머니는 의식이 있었다.
Medic 14 구급대는 파라메딕 두 명이 출동하는데 운전은 돌아가면서 했다. 구급차 안에서 그 두 명이 처치하는 모습을 유심히 봤다. 바이탈을 측정하고 정맥로를 확보했다. 할머니 의식이 희미해지고 내가 보기엔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않았다. 그래도 구급차는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사람들이 할머니를 죽이려고 하나? 왜 출발을 안 해?’
나라면 분명 구급차 사이렌을 울리며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기 바빴을 것이다. 기관 삽관을 하고 심전도를 측정했다. 구급대 요청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의사 지도로 약물을 주입했다. 의사가 돌아가고 그제야 구급차는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들것으로 옮겨지는 할머니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 할머니가 내 환자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방관이 되고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다. 구급 분야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책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UPMC 의학서점에서 청진기를 75불인가? 당시 환율로 10만원 정도에 샀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기 마련인데 내겐 미국 연수가 그랬다.
2001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음 해 서울보건대(현 을지대)에 입학했다. 대학원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다 기초부터 다지자고 마음먹고 응급구조학부를 선택했다. 2년 과정 응급구조학과가 3년제로 바뀐 해였다. 그때도 소방관들은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었다.
당시 서부소방서 구급대 생활은 고달팠다. 은평구와 서대문구 인구가 약 70만명쯤 됐는데 오로지 구급차 7대가 맡았다. 비번 날마다 통학만 왕복 3시간이 걸렸다. 2년 다니고 지하철에서 갑자기 호흡곤란과 부정맥이 왔다.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1년 휴학하고 3년 과정을 마쳤다.
미국 파라메딕과 같은 전문가가 되겠다는 열정에 버틸 수 있던 세월이었다. 스트레스에 약한 사람이 참 오래도 여러 서에서 구급차를 탔다.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 결국 미국 파라메딕 수준의 현장 처치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 내 역량이 부족했다.
그래도 책은 냈다. 현장 활동하면서 상황실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틈틈이 한 장, 한 장 긁어모았다. 머리말을 가장 마지막에 써서 완성한 원고를 무작정 군자출판사로 가져갔다. 쓰기 시작하고 책으로 나오기까지 4년이 걸렸다.
12년 정도 되는 구급대원 생활은 몸이 힘들었고 심리적 스트레스로 마음은 거칠어질 때가 많았다. 구급대원으로서 보람보다 힘든 기억, 아쉬운 기억, 잊히지 않는 기억들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2003년 서부소방서 북가좌안전센터에서 근무할 때였다. 새벽에 역촌안전센터 바로 뒷집에서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 역촌구급대가 출동 중이라 북가좌구급대가 출동했다. 30~40대 부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남편에게 심정지가 온 걸 같이 자던 부인이 발견하고 119에 신고했다. 살리지 못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당시 역촌안전센터 구급대는 미이송한 음주자 신고로 출동 중이었다. 같이 자던 부인이 평생 안고 갈 트라우마와 상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역촌구급대가 출동 중이 아니었다면, 펌뷸런스 같은 시스템이 있었다면, 우리 119상황실이 좀 더 정교했다면, 아니 내가 Medic 14 같은 구급대원이었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20년 세월을 건너 중부소방서 현장대응단 화재 진압대원으로 일하던 2022년 8월 15일. 그날은 원래 휴가 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묵을 콘도를 예약했지만 노모께서 같이 가길 원치 않으셔서 휴가를 취소하고 출근했다.
직원과 점심을 먹으며 20년 전 안타까웠던 그 경험을 나눴다. 그날 혹시 심정지 펌뷸런스 출동이 나면 내가 출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2시간쯤 후 오후 1시 36분에 중구 신당동 대추나무 포차에 심정지 펌뷸런스 출동이 났다.
신당 구급대는 출동 중이었고 현장대응단 펌뷸런스가 먼저 도착해 심폐소생술과 두 번의 제세동을 하고 환자 맥박과 호흡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61세 심정지 환자가 건강하게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급대원으로 일하면서 차곡차곡 쌓여있던 마음의 빚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현장 활동을 몸이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고 승진도 뒤처진 늙은 소방관에게는 남모를 서러움이 있었다. 심사 네 번 만에 소방경을 달았다. 그리고 첫 번째 글에서 밝힌 것처럼 카메룬 현장 매니저 일을 제안받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이제 남이 시키는 일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카메룬으로 떠나면서 짐 정리를 했다. 4단 책장 하나를 채울 만큼의 책을 나눔하고 일부는 버렸다. 구급현장에서 배울만하거나 내가 실수한 출동은 일지를 복사해 뒀었다. 하나하나 보면서 잘게 찢어 버렸다.
낡은 출동일지에 그날의 아픔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대부분은 퇴색된 글자처럼 기억의 흔적도 휘발돼 남아 있지 않았다.
죽어가던 사막 장미가 예쁘게 살아났다. 꽃도 피웠다. ‘무모한 사랑’이 사막 장미의 꽃말이다. 카메룬은 병원 전 응급의료 시스템이 뿌리내리기엔 너무 메마른 땅이다. 어쩌면 카메룬에서의 도전이 무모한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력을 쌓았고 어떻게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 구축 사업 현장 매니저로 일하게 됐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다. 인생은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굽어 꺾여 내려간 길’일지도 모르겠다.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봐도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걷다 보면 또 다른 갈래가 있지 않을까? “이 일에 어떤 역량이 필요합니다”라는 말보다 굽어 꺾여 있다 갑자기 나타난 지금 걷고 있는 길을 설명하려다 보니 긴 넋두리가 되고 말았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사막에 핀 장미가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유기운 서울에서 생계형 소방관으로 30년 근무했다. 현재 소방관 인생을 마무리하고 갑자기 아프리카로 튀어 카메룬 야운데에서 코이카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EMSS) 구축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PMC_ 유기운 : waterfire119@naver.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1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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