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기고] 재난 현장은 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깊이 준비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열린 ‘2025 National Urban Search & Rescue Conference’(국제 도시탐색구조 컨퍼런스)는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재난의 양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지금 구조대가 갖춰야 할 역량 역시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 컨퍼런스는 그 변화의 방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자리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HERS 과정: 중량물 구조는 ‘기술’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다
이번 출장에서 필자가 가장 집중해 참여한 과정은 ‘HERS’(Heavy Equipment & Rigging Specialist, 중량물 장비ㆍ리깅 전문가 과정) 였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이 인증하는 이 과정은 단순히 장비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중량물 구조 상황에서 필요한 사고방식과 판단 능력을 강조하는 교육이었다. 훈련 내내 반복된 메시지는 분명했다. ‘중량물 구조는 장비가 아니라 판단이다’는 것이다. 훈련은 이 메시지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이어졌다.
① 하중 계산과 리깅 원칙 이해: ▲각도 변화에 따라 하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 슬링ㆍ체인ㆍ샤클의 등급과 손상 기준 ▲‘안전계수’를 확보해야 하는 이유
② 크레인 운용 개념과 위험 평가: ▲붐 길이와 각도에 따른 하중 변화 ▲신호자(spotter)의 역할과 중요성 ▲2차 붕괴 가능성 평가
③ 절단ㆍ인양ㆍ고소 작업 실습: ▲아세틸렌ㆍ프로판ㆍ가솔린 토치 절단 ▲차량ㆍ버스ㆍ컨테이너 인양 ▲크레인 바스켓을 활용한 고소(高所) 절단
④ 종합 시나리오 평가: ▲붕괴 구조물 접근 ▲리깅 포인트 선정 ▲무전 기반 시그널링 ▲팀 단위 전술 판단
미국 USAR 대원들과 함께한 ‘현장의 온도’
이번 훈련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미국의 USAR(Urban Search And Rescue) Task Force 대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미션을 수행했던 시간들이었다.
훈련은 단순한 기술 실습이 아니라 서로의 방식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크레인 바스켓에 함께 올라 고소 절단을 진행하던 순간, 붕괴 구조물 앞에서 리깅 포인트를 두고 의견을 나누던 순간, 그리고 하루 종일 먼지 속에서 작업을 마친 뒤 장비를 정리하며 짧은 농담을 주고받던 순간들까지.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안전’, ‘팀워크’, ‘생명’이라는 공통의 목표는 말보다 더 빠르게 통했다. 미국 대원들은 자신들의 실전 경험을 아낌없이 공유했고 우리는 한국 구조대의 접근 방식과 사고를 설명하며 서로의 차이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뢰와 친밀감이 쌓였다.
훈련 마지막에는 미국 각 주 구조대원들과 소감을 나누며 앞으로도 이런 실전형 교육에서 다시 협력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됐다.
무엇보다 크게 느낀 점은 재난 앞에서는 국적보다 ‘동료’라는 정체성이 먼저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기술과 장비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고 함께 움직이는 팀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시간이었다.
Logistics 과정이 보여준 것: 구조대의 지속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손’이 결정한다
재난 현장에서 구조대의 능력을 결정하는 요소는 기술만이 아니다. 장비ㆍ식수ㆍ전력ㆍ캠프ㆍ문서ㆍ운송을 책임지는 물류(Logistics) 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 구조팀이 장시간 버틸 수 있다.
미국의 ‘Logistics’ 과정에서는 ▲장비 캐시 관리 ▲위험물 운송 규정 ▲팔레트 구성 ▲BOO(Base of Operations, 현장 기지) 구축 ▲전력ㆍ조명ㆍ위생 시스템 운영 등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고 있었다. 한국 구조대도 앞으로는 전문 물류 인력 양성이 필수적이다.
파키스탄 재난 사례가 던진 질문: “우리는 복합재난에 준비돼 있는가”
가장 인상 깊었던 세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대규모 재난 대응 사례였다.
홍수, 토사 붕괴, 취약 주거지의 연쇄 붕괴가 동시에 발생하는 복합재난은 한국에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션에서 강조된 메시지는 명확했다. ▲재난은 한 가지 형태로 오지 않는다. ▲여진, 2차 붕괴, 치안 문제, 정보 단절 등 ‘비기술적 위험’이 더 크다. ▲현지 구조대와 국제 구조대의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 ▲사전 위험지도(Hazard Mapping)와 취약지역 데이터베이스가 생명을 살린다.
최근 한국에서도 수해ㆍ땅꺼짐ㆍ붕괴ㆍ화재 등 복합재난이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훈련이 단일 재난이 아닌 복합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국제 인도주의 구조 세션에서 확인한 대한민국 구조대의 위상
또 하나 의미 있었던 순간은 국제 인도주의 구조경험 세션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 대표단은 단순한 수강생이 아니라 발표자로 참여했다. 중앙119구조본부 훈련과장님이 소개한 ‘KDRT’(Korea Disaster Relief Team, 대한민국 국제구조대)의 교육ㆍ훈련체계는 여러 국가의 구조대와 NGO 관계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특히 주목받은 부분은 ▲UN 국제구조기구 INSARAG(International Search and Rescue Advisory Group) Heavy 등급 유지 ▲36시간 연속 시나리오 기반 합동훈련 ▲구조ㆍ의료ㆍ물류(Logistics)ㆍ통역이 하나의 팀처럼 움직이는 통합 운영 방식 ▲국제 조정체계(OSOCC·RDC·VOSOCC)의 실제 운용 능력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 조정체계는 재난 현장에서 여러 국가의 구조대가 혼란 없이 협력하도록 만든 UN의 시스템이다. 한국 구조대가 이 체계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것은 국제 기준에 맞춰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다.
맺으며
이번 SUSAR(State Urban Search & Rescue Alliance, 미국 주 도시탐색구조연합) 컨퍼런스는 우리 구조대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 자리였다. 특히 중량물 구조 분야는 우리 구조대가 반드시 강화해야 할 영역이며, 이번 HERS 과정은 그 필요성을 다시 확인시켜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재난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구조대가 마주할 위험도 깊어지고 있다. 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사고방식, 준비, 협력이 모두 필요하다.
대한민국 구조대의 다음 단계는 이미 시작됐다. 이번 경험이 그 변화를 더 빠르게,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송파소방서 잠실119안전센터 소방장 김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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