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5일 본지를 통해 보도된 황준호 소방기술사의 인터뷰로 소방설계분야의 문제점들이 공론화되면서 소방기술분야 엔지니어들의 강도 높은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때문에 본지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전문 소방기술자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다 나은 발전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연속기획 ‘현장의 실정과 기술이 접목된 산업정책이 필요하다!’를 마련해 집중적으로 소방엔지니어들의 목소리를 조명하고자 한다.
제1탄으로 소방기술자가 바라보는 현 소방설계 및 감리의 시각을 거침없이 드러낸 황준호 소방기술사에 이어 제2탄으로 소방기술사로서 현장에서 탄탄한 경력과 지식을 쌓으며 ‘한국화재연구소’라는 엔지니어를 위한 사이트까지 운영 중인 여용주 소방기술사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담아 봤다.
누구를 위한 소방정책인가 ?
여용주 소방기술사는 “예전에는 소방공무원들이 소방인들 눈치를 보는 시늉이라도 했었는데 요새는 아예 노골적으로 제 밥그릇 챙기겠다는 의지를 법안에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내놓고 있다”며 “하도 어이가 없어 논리적인 대응보다는 그저 가슴만 답답해진다”고 토로했다.
얼마 전 소방시설공사업법 개정안에 시공능력평가와 소방기술자 경력관리를 한국소방공사협회만이 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입법예고한 것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여 소방기술사는 “현재의 한국소방안전협회에서 하던 업무인 시공능력평가와 경력관리를 한국소방공사협회에 넘겨주기 위한 논리를 ‘다양한 기관과 단체에서도 동일한 업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법을 바꾸면서까지 무리해서 넘겨주더니 이제는 아예 한국소방공사협회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다시 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법안을 추진하는데도 정부 부처 내 어디에서도 문제점이 제기되지 않고 개정안이 그대로 제출되었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여용주 소방기술사는 그간 소방이라는 분야에서 서슴없이 쓴소리를 하던 인물로 평가가 자자했다. “지금은 소방에 대한 열정도 많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소방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극도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용주 소방기술사는 “국가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공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일도 때로는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너무도 지나치다는 것”이라며 “작금의 현실을 보면 마치 망해가는 나라에서 있을 법한 일들이 생기고 있어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재미있는 것은 같은 조직인데도 일선에 근무하는 분들은 죽어라 고생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라며 “격무에 시달리는 일선 실무자들의 근무환경 개선 같은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주변의 몇몇을 위한 조직 이기주의를 위해 정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반박했다.
이는 현 정부가 규제완화와 정부조직의 슬림화를 위해 공무원을 감축하는 방안과는 상반되게 모순적인 조직 확대에 대한 비판이고 그러한 이기주의가 자신들의 조직인 119안전센터의 3교대나 일선소방서의 격무를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게 여용주 소방기술사의 설명이다.
그는 “실제로 일선 소방서의 공무원들은 구조구급과 화재에 목숨을 건 투사로 일하면서도 퇴근하면 쉬기는 커녕 교육을 받거나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허가동의제도는 바뀌어야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설계가 잘못되면 시공 후 시설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이렇듯 설계는 가장 중요한 핵심기술이자 그 자체로 완성된 기술이고 시공은 이러한 설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용주 기술사의 의견이다.
그는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계를 검토해 승인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일선 실무자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공무원들은 일정기간 중앙소방학교에서 소방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 습득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설계를 심의하는 소방공무원들의 전문성 확보를 위해서는 턱 없이 부족한 교육임은 물론, 실무경험이 없는 소방학교 차원에서의 교육은 그야 말로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여용주 소방기술사의 지적이다.
여 소방기술사는 이러한 상황을 경험을 통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나름대로 고민해 시스템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기술을 적용한 도서를 제출하면 법 규정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지만 반대로 대충 기준에 맞추어 제출된 도서는 허가가 난다”며 “물론 극단적인 예를 든 면도 있으나 이러한 현실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세상은 첨단으로 바뀌어가고 있는데 소방은 여전히 수도꼭지에서 물을 틀듯 단순히 물을 퍼부어 불을 끄면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여용주 기술사.
그는 “이러한 이유로 아직도 소방이 학문으로서 정립되지 못하고 있고 비전문가가 일선에서 설계도면을 검토 승인하고 있는 것”이라며 “경직된 법체계에 소방기술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그러면서도 경직된 법이라도 시대와 세계의 표준기술을 수용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조직에서 이뤄지기란 불가능이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이러한 이유는 소방정책을 총괄하는 소방방재청의 시스템이 여전히 구시대적인 생각에 머물러있다는 현실을 증명하는 것”이라는게 여 소방기술사의 해석이다.
사전규제위주의 후진행정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여용주 소방기술사는 “회사가 경고를 받은 것이 하나 있다”라며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소방인들 끼리 모이면 우스갯소리지만 언제 범법자로 몰려 잡혀갈지 몰라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농담들을 많이 한다”며 “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고의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바닥에서는 재수 없으면 범법자가 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경고를 받은 사항은 얼마 전 준공이 끝난 현장에 서울소방본부 감사가 있었는데 옥상제연 팬의 흡입구와 타 설비 배출구간의 이격거리가 기준에 미달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로 인해 담당 감리자는 형사고발까지 당하면서 마음에 고초를 겪고 여용주 소방기술사가 근무하는 회사는 경고를 받았다.
여 소방기술사는 “설계자체가 원래 잘못된 상태였거나 수 없이 많은 규정 중 미처 검토하지 못한 단 몇 개 때문에 혹은 지키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규정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무능력자로 낙인 찍히고 거기다가 형사고발까지 당한다면 이는 행정지도의 차원을 넘어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밖에 볼 수 없지 않느냐”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공권력은 함부로 휘두르라고 국민들이 쥐어준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아무나 휘두르게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된다”라며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구태에 빠져있거나 잘못된 국가관이나 가치관을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자나 상황에 대한 인식 없이 앵무새같이 규정이나 문구만 따지는 자, 자신이 행하는 일이 법의 취지를 벗어나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모르는 자, 자신의 능력보다 과분한 자리에 있는 자 등 최소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공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제는 국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이 이뤄져야
“소방방재청에 기술을 아는 전문가가 있습니까?”
여용주 소방기술사는 “우리나라의 화재안전기준은 국가 주도로 소방방재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개정 되고 있다”며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경우에도 국가가 주도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전문가 집단이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방행정을 주관하고 있는 소방방재청이나 지방소방본부 등의 구성원들 중 엔지니어 측면에서 화재에 관련된 전문가는 극히 드물다. 정부는 화재에 대한 안전대책을 수립하고 기술기준을 정립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부에서 전문가를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여 소방기술사는 “소방분야 최고의 기술전문가 집단으로 볼 수 있는 소방기술사회가 소방방재청에 공식적으로 내놓은 의견도 화재안전기준에 수많은 개인 의견들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며 “소방기술사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비참한 심정이나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아파트의 스프링클러 배치간격을 검정 시 방수도달거리를 기준으로 배치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이에 대해 여용주 소방기술사는 “이는 명백히 기술을 잘못 적용한 것으로 국제 사회에 코미디감이 될 만큼 창피한 사건인데 문제는 본인과 같은 기술자들이 그러한 기준을 강제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라며 “그렇게 설계한 도면을 외국에 들고 나가 설명한다면 한국의 소방기술자를 얼마나 한심한 인간으로 바라보겠냐?”라고 했다.
그는 또, “더 이상 작은 밥그릇에 연연하지 말고 큰 밥그릇으로 키울 생각을 해야 한다”면서 “작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소방기술발전을 저해하면서까지 권한을 유지하려 하지 말고 보다 큰 시각으로 이제는 국가와 민간의 역할분담을 확실히 하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구조 및 구급 그리고 화재진압분야를 담담하고 소방기술은 민간에게 완전히 이양하는 길만이 국가경쟁력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라는 거대한 전제에 충실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것이 여 소방기술사의 지론이다.
유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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