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의 동행… 함께 기억하며- Ⅱ2024년 한국응급의료체계 순직자 추모 자전거 국토 종주라이더 J(부분 구간 라이더) “혼자서 빨리 갈 수는 있지만 함께라면 멀리 갈 수 있다! 그들과의 동행 함께 기억하며”
나는 평소 자전거를 즐기지 않았고 심지어 자전거도 없는데 무언가에 이끌리듯 가족에게 자전거를 빌려 참여하게 됐다. 다른 이들과 달리 부분 참여였지만 곁에서 동행한 동료들이 없었다면 일정을 마무리하기 힘들었을 거다.
200여 ㎞를 달리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힘든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유가족들은 더 힘든 시간을 보냈고 어쩌면 현재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마음으로나마 함께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3월쯤 소방의 양모 선생님을 통해 이 뜻깊은 여정에 대해 알게 됐다. 평소 체력에 자신이 없었던 점과 올해 초 차량이 폐차되는 큰 교통사고로 인해 몸이 회복되지 않아 참여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해 5월 주최자인 우모 선생님과 연락하며 다시 한번 소식을 접했다. 부분 참여(대구~부산)도 가능하다는 얘기와 함께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응원, 격려 덕에 행사에 참여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처음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과연 응급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추모를 위한다는 큰 뜻을 담을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중요한 일에 내가 민폐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무의미한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내 주위에서 이끌어 주는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유가족분들의 마음, 응급의료체계에 종사하다 순직하신 분들이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4일 차(대구~합천) 대구 응급구조학회와 무심사 전날 밤 온갖 걱정이 들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응급구조학회에서 감사하게도 행사의 취지와 목적을 많은 분에게 설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덕분에 인천에서부터 달려온 동료들과 함께 학회에서 우리의 취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인천에서 대구까지 3일간의 여정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다.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동료와 눈시울이 붉어진 학회 참석자들을 보며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처음 결정할 때보다 우리가 지금 행하는 일이 더욱 뜻깊고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이번 일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첫 번째 고비, 무심사 처음은 평소 연습하던 길이라 힘들지 않았으나 50㎞를 지났을 무렵 무심사라는 엄청난 언덕을 만났다. 예상했던 대로 평소 업힐은 연습하지 않았어서 얼마 가지 않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스스로 너무 한심스러웠고 동료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옆에서 함께 해준 대구소방 안 선생님은 그런 죄송스러운 마음을 아시는지 “이건 죄송한 게 아니야. 우리는 함께 가기 위해서 지금 이걸 하고 있는 거야”라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지친 나를 배려해 내 자전거를 끌어주기도 하셨다.
마음만 앞서 있던 내가 다시 힘을 내는 계기가 됐다. 그 후 80㎞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고 대구에서 합천까지의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5일 차(합천~부산) 박진 고개 ‘오늘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종아리와 엉덩이에 근육통이 밀려왔다. 앞서 출발한 분들에 비하면 내 근육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라이딩 출발 전 순직자들에 대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묵념하는 동안 다시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행하는 모든 일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마지막 일정을 오늘도 어김없이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고비는 이내 곧 찾아왔다. 박진 고개… 무심사보다 가파르진 않았지만 만만치 않았다. 허벅지에는 통증이 밀려왔고 자전거를 또 멈추고 싶으면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박진 고개를 오르는 동안 멈추다, 가다를 반복했다. 순직하신 분들의 마음이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올랐다. 정상에는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게나마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그분들께 닿도록 하고 싶었다. 혼자 철조망에 노란색 리본을 걸었다. 마음 한편이 저릿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후에도 여정은 계속됐다. 몸은 점점 지쳐만 갔다. 삼랑진쯤 왔을 때 머리는 괜찮다고 하지만 몸은 괜찮지 않은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평지였는데도 맞바람은 불었고 계속 뒤처지고 있었다. 양산쯤에서는 체력적 한계가 느껴졌다. 간격이 벌어진 나를 양 선생님이 계속 이끌어 주시며 함께 해줬다.
마지막 휴식 후 20~30여 ㎞밖에 남지 않았을 때부터는 남은 힘을 다 내고 싶었다. 저 멀리 마지막 지점인 을숙도가 보였다. 사실 그때부터 눈물이 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눈물이 맺혔다.
을숙도에 도착하자 대한응급구조사협회 부산지회에서 우리를 맞아 줬다. 동료들 모두 눈물을 글썽였다. 마지막 추모식을 마치고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다.
혼자였다면 끝까지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나보다 더 먼 길을 달려왔는데도 힘들어하는 내 곁을 지켜준 동료 선생님들, 매일 아침 라이더보다 먼저 일어나 살뜰히 챙겨주던 스태프분들이 함께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힘들었을 유가족의 마음이 다시금 힘을 낼 수 있게 해줬다.
시작은 쉽지 않았지만 함께 할 수 있었기에 더 멀리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의 시작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작은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큰 뜻이 되듯이 앞으로 마음들이 더 모인다면 유가족에게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마치며 주최자 W.(전 구간 라이더, 운영진) “첫 번째 동행을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미국에서 911구급대원으로 일하며 EMS 순직자들을 위한 자전거 추모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가슴 따뜻한 그들만의 문화가 너무 부러웠다.
우리도 언젠가 서로를 챙겨주고 기억해주는 그런 문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지인들과 함께 실현하기까지 어언 10년 동안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에서 순직하신 분들이 늘어갔고 유가족도 더 많이 생겨났다.
마냥 기다린다고 미국과 같은 추모 문화가 절대 스스로 생겨나진 않으니 언젠가 누군가는 시작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조촐하더라도 첫발을 내딛는 마음으로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다.
그간 적잖이 힘든 과정이었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며 함께 해준 운영진에게 무한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더불어 좋은 뜻으로 개인 시간을 할애해 행사에 참여한 라이더들과 이번 추모행사를 위해 도와주신 일일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의 응원과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번 행사 개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리라.
특히 행사의 취지만 듣고도 선뜻 큰 도움을 주신 위코멧과 인산의료기, 메스코리아, 유유메디컬스, 래어달메디컬코리아, 한국응급구조학회, 아미노바이탈, 울산구급전문교육사협의회, 그리고 수많은 개인 후원자께 이 글을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들과의 동행, 함께 기억하며” 함께라 행복했고 응급의료체계에 종사하다 순직하신 분들의 영면과 유가족의 안녕을 이번 행사에 함께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원합니다. 끝으로 이번 추모행사 일정의 마지막을 환대해주신 대한응급구조사협회 부산지회에 감사 인사와 함께 부산 기장소방서 고 이상영 님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마칩니다.
한국응급의료체계 순직자 추모사업회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9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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