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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처음부터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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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방안전원 부산지부 시상수 지부장 | 기사입력 2026/04/28 [11:30]

[기고] 처음부터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국소방안전원 부산지부 시상수 지부장 | 입력 : 2026/04/28 [11:30]

 

▲ 한국소방안전원 부산지부 시상수 지부장

몇 년 전 고등학생이던 아들에게 최신형 아이폰을 사주며 다짐을 받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먼저 사줄게. 대신 다음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지면 그때는 이유를 불문하고 반납이다” 일단 물건은 손에 쥐어주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효력이 소멸하는, 행정법상 ‘해지조건(解止條件)’을 부관(附款)으로 붙인 셈이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성적은 떨어졌고 약속한 반납의 시간은 왔다. 하지만 나는 끝내 아들의 손에서 폰을 뺏어오지 못했다. 이미 일상이 된 권리를 거두는 일은 쉽지 않다. 차라리 처음부터 허락하지 않는 편이 덜 고통스럽다.

 

지나온 길을 복기하고 미래를 재설계하는 데 이 사적인 실패의 기록만큼 유용한 도구는 없다. ‘그때 단호하게 회수했더라면’, 혹은 ‘성적 이후로 미뤘더라면’이라는 가정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성찰이다.

 

이 경험은 마치 국가 안전망의 취약한 단면을 비추는 듯하며 그 구조는 오늘날 소방안전관리자 선임 제도와 그대로 겹친다.

 

소방안전관리자 선임 제도의 본래 구조는 자격을 갖춘 자만이 선임될 수 있는 ‘정지조건’(停止條件)’이다. 자격 취득이라는 조건이 성취돼야 비로소 선임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법적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제도는 관리업자에게 업무를 위탁하는 ‘안전의 외주화’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면서 이 원칙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자격 없는 관계인이라도 일단 선임부터 하고 사후에 교육을 받도록 하는 해지조건을 규제완화 차원에서 도입한 것이다.​

 

문제는 이 기형적인 ‘해지조건부 선임’이 예외를 넘어 어느덧 제도의 몸통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소방청 통계에 따르면 2025년 1월 기준 전국 선임 대상물 중 업무대행 비율은 45%를 넘어 어느덧 절반에 육박한다. 2005년 5.9%에 불과했던 대행률이 폭증한 현실에서 본래 기준인 ‘정지조건’은 흐려지고 ‘해지조건’이 오히려 주류가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3개월 내 교육 이수라는 약속이 깨지는 순간 그 선임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소급해 무효가 돼야 마땅하며 화재예방법체계의 본령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현실의 법 집행은 문구와 단어의 해석을 애매한 영역으로 몰아넣으며 본질을 흐린다. 형사법상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을 행정 규제의 영역에 교묘히 대입, 판단이 모호할 때는 무조건 피규제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자의적 관행이 지배하고 있다. 강습교육은 사후에 적당히 완수할 과제가 아니라 소방안전관리자라는 법적 지위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존립 근거인데도 말이다.​

 

물론 현장에는 서릿발 같은 원칙으로 교육 미이수자를 엄격히 조치하며 법 집행의 엄중함을 지키려는 극소수의 공무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의 고군분투는 대개 “일단 선임 신고는 돼있지 않느냐”는 안일한 관행과 부딪혀 고립되기 일쑤다. 대다수 행정 현장은 성적이 떨어진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마음으로, 벌칙 적용의 고단함과 민원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판단을 뒤로 미룬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방종이며 책임의 방기다. 원칙을 지키는 소수의 집행이 ‘별난 일’이 되고, 방치하는 다수의 침묵이 ‘관례’가 되는 사이 제도는 스스로 정립한 가치를 파괴한다. ‘선임 신고’라는 형식이 ‘현장 안전’이라는 실질을 압도하는 순간 경각심은 화석화되고, 서류상의 기록은 결코 안전의 보루가 될 수 없다.

 

역사에 ‘만약’을 더하는 순간 인과는 끝없이 미끄러진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을 경계한다. 그러나 재난의 역사에서 ‘만약’은 부질없는 상상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선택들을 비추는 가장 잔혹한 거울이다. 참사 이후에야 “만약 그때 자격 없는 선임을 바로잡았더라면”이라며 인과를 거슬러 오르는 일은 언제나 늦은 자각에 불과하다.

 

국가의 소명은 자격 없는 자에게 ‘선임’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이름과 실질 사이의 간극을 끝까지 좁히는 데 있다. 자격 없는 선임이 방치되는 순간 제도는 보호막이 아니라 방패를 가장한 허울로 전락한다. 형식이 실질을 대신하는 순간 안전은 더 이상 준비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으로 치환된다.

 

지금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결과 앞에서 원인을 추적하며 같은 궤도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설령 모든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업무대행과 강습교육이 기형적으로 뒤섞인 채 ‘안전’을 참칭하는 작금의 선임 구조는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거악이다.

 

한국소방안전원 부산지부 시상수 지부장

 

※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 등은 FPN/소방방재신문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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