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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119] 6.25 전쟁 중 순직한 손진명 소방원

김진태 스토리텔러 | 기사입력 2022/11/21 [09:00]

[리멤버 119] 6.25 전쟁 중 순직한 손진명 소방원

김진태 스토리텔러 | 입력 : 2022/11/21 [09:00]

소방공무원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안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는 일.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첫걸음이지 않을까요?

 

<119플러스>가 순직소방공무원추모기념회와 함께 순직소방관의 이야기를 지면에 담으려고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6.25 전쟁 중 해군경비부 포항기지 사령부에 급수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북한군에 의해 순직한 손진명 소방관의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 그의 일대기 속으로 떠나보시죠.


 

소속: 경북 포항소방서 계급: 소방원

성명: 손진명

1923년 11월 8일 경북 경주시 출생 ~ 1950년 8월 10일 순직

 

손진명 소방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경북 경주시 양동리에서 태어났다. 양동마을은 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유명한 양반 마을로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손 소방원 역시 이곳 경주 손씨의 후손이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생계가 어려워져 일자리를 찾아 가족 모두가 포항으로 이주했다. 

 

청년이 됐을 무렵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홀어머니를 남겨둔 채 일본군에 징집됐다. 3년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버텼다. 꿈과 같은 해방을 맞아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조국을 위해 군에 입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어머니의 강한 만류로 군에 입대하진 못했다. 당시 어머니는 그의 결혼을 서둘렀다.

 

수줍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영일 출신의 김경선(19)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고 포항 경북여객의 운전사로 취업했다. 당시 경북여객은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버스 3대와 택시 2대를 모아 운행하는 작은 운송회사였다. 차량 고장이 잦아 매일 정비를 병행해야만 운행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성실하게 모든 일을 해냈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이때 포항소방서에 근무하는 친구의 권유로 소방원이 된다. 소방서에서도 기술과 성실함을 인정받았고 불 잘 끄기로 유명한 소방수가 됐다. 기관부 책임자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가 근무하던 포항소방서에는 급수차를 포함해 총 4대의 소방차량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낡은 차량뿐이라 고장이 잦았다. 손 소방원의 손길이 닿아야만 시동이 걸렸고 퇴근 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 차량을 수리해야만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께 북한군의 기습적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8월에는 북한군 12사단의 동남진으로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포항 시내에 북한군이 쏜 대포가 떨어지고 밤새 총소리와 피난민들의 아우성으로 혼란은 극에 달했다.

 

8월 10일. 소방원 모두는 전시 지원을 위해 소방서에 몇 날 며칠을 대기하고 있었다. 손 소방원 역시 태어난 지 백일밖에 안 되는 둘째 아들이 눈앞에 아롱거렸지만 집에 들를 겨를이 잠시도 나지 않았다.

 

이날 새벽 해군 포항기지 사령부에서 긴급히 출동하는 군함에 급수가 필요하다며 소방서에 지원을 요청했다. 손 소방원은 위급한 상황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짝을 맞춰 소방차 운행을 담당했던 조수 소방원이 따라나섰지만 손 소방원은 동행을 거절했다.

 

“지금은 전시라 너무 위험하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 혼자 다녀오겠다. 너는 남아서 소방서를 잘 지켜야 한다”고 당부한 뒤 곧바로 급수차의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이때가 오전 4시께였다.

 

당시 소방차의 급수탑은 현재 포항의료원이 들어선 도립병원 앞에 있었다. 소방차를 세우고 물을 받던 중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인근에서 도망치는 사람들, 피난을 유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매우 위급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런데도 손 소방원은 급수 작업을 중단하거나 소방차를 버리고 피신할 수 없었다. 급수차는 포항소방서가 보유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소중하게 쓰일 장비였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차로 해군 함정에 급수 지원을 무사히 완료하고 소방서로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로는 피난에 나선 시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물을 실은 소방차가 득량동까지 왔을 땐 인파에 묻혀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운전대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인민군이 기습적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인민군들은 군복과 비슷했던 당시의 소방복을 입은 손 소방원을 심문한 뒤 그가 군인이 아닌 걸 알았음에도 27살의 젊은 그를 길옆 콩밭으로 끌고 가 즉결처분했다. 이때 학살 현장을 목격한 마을 이장이 시신을 거둬 콩밭 가에 묻었다. 

 

김경선 씨는 밤새 이어진 요란한 총소리에 불안함을 느꼈다. 날이 밝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중 소방서 직원이 달려와 위험하니 피난해야 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손 소방원의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버텼다. 조금 후에는 후퇴하는 군인들이 와서 인민군이 코앞이니 어서 피난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할 수 없이 김경선 씨는 시어머니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서야만 했다. 

 

며칠이 지나 피난처에서 만난 지인으로부터 남편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김경선 씨는 한차례 실신하기도 했다. 피난길에 만난 소방서장은 모금한 것이라며 돈을 전해 줬다. 남편 친구들도 손 소방원의 죽음을 슬퍼하며 위로금을 보탰다. 김경선 씨는 이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이 돈으로 두 아들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셨다. 

 

전쟁이 가져온 참상으로 인해 마냥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수줍음을 타던 새댁은 살기 위해 막노동을 비롯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억척스러운 여인으로 변해갔다.

 

전쟁이 끝난 후 1961년 손진명 소방원의 공로가 인정돼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게 됐다. 유해는 가매장됐던 득량동 콩밭에서 인근 경주 최씨 선산의 비탈진 곳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이 지역이 택지개발계획지구로 지정됐다. 가난 때문에 미처 묘지를 구하지 못했던 가족들은 손 소방원의 유골을 화장한 후 포항 앞바다에 뿌렸다.

 

올해 8월 8일 이흥교 소방청장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95세가 된 김경선 씨를 만났다. 손 소방원의 위패 봉안식 자리였다.

 

소방청은 잊혀진 선배 소방관 묘역 찾기 사업을 진행하면서 손진명 소방원을 찾게 됐다. 소방청의 노력으로 손 소방원은 비로소 75년 만에 현충원에서 영면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위패 봉안식에는 장성한 그의 후손 15명도 함께 자리했다.

 

김경선 씨는 위패 봉안이 끝난 후 (사)순직소방공무원추모기념회 김종태 사무총장을 만나 다음과 같은 심경을 전했다.

 

“돌이켜 보면 나만큼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젠 나이가 들고 힘들어 제대로 걸을 힘도 없게 됐지만 결혼 후 44개월을 같이 산 소방관 남편의 이름과 얼굴 생김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95세의 노인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72년 전 둘째를 낳고 좋아서 빙그레 웃던 남편을 추억하며 과거 속으로 달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글_ 김진태 스토리텔러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2년 1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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