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기고] 청렴 선인 '이 안 눌'... 그를 품자!은평소방서, 청렴연수를 다녀와서
당연히 부산의 청백리에 대하여 알아보았고, 그렇게 이안눌을 만났다. 그 이안눌을 함께 공유해보자. 이안눌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본관은 덕수(지금의 경기도 개풍군에 있었던 지명), 중종때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이안눌은 담양부사, 경주부윤, 강화유수 등의 외직을 포함하여 형조참판·예조판서까지 지낸 고위 관료이면서, 많은 시문을 남긴 걸출한 문인이었고 청렴결백한 선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검소하고 착하기까지... 시쳇말로 엄.친.아.라는... 그는 일찍이 특진관으로 왕을 모실 때 조정의 시비가 밝지 못하고 상벌이 공평하지 못함을 극간하여 대신들을 공박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의 바른 말을 싫어하는 조정 대신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에 의하여 배척됨으로써 점점 소외되어 갔다. 그러나 항상 고결한 심지는 변함없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청렴일화를 보면, 이안눌은 진사였던 이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0세 되던 해 같은 문중의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필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안눌의 양모인 구씨 부인은 당시 전국에서 이름난 갑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안눌은 40년 가까이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살았다. 고을살이를 하면서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나라의 재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치밀하면서도 그 많은 집안의 재산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충남 당진군 면천면을 비롯 전국에 널려있는 그의 농토를 남들이 제멋대로 차지하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가난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를 딱하게 여긴 주변사람이 그에게 묻길, “대감은 어째서 나라 살림에는 그렇게 밝으면서 가산을 다스리는 데는 어찌 그리 허술하시오?”그러자 이안눌이 말하길, “내가 방탕해서 가산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오. 내 선대의 토지는 너무나 많아서 이것을 관리하는 데에는 한 고을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오. 그런데 나는 나아가서는 나라의 정무를 다스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만큼 언제 가산을 돌볼 틈이 있겠소” 또 다른 일화는 병란중에 집이 불타버린 백형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백형이 작고한 다음에는 질녀들의 혼사를 자기 딸처럼 챙기고, 또 식솔이 많으면서 가난하게 사는 중형을 위해서도 평생 생계를 돌보아 주었으며, 남산 밑에 있었던 큰 저택도 서슴지 않고 조카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낡은 헌 옷과 가난한 식생활로 한 평생을 살았고...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이러한 검소함과 타고난 인품으로 인조 14년(1636) 청백리에 녹선되었지만 굳게 사양하였고 이에 왕 또한 그 사양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백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眞正한 청백리가 아닌가?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건 왜일까. 공직에 있는 우리, 더욱 더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이안눌을 찾아 헤매었다. 최근 해운대에 있는 이안눌의 시비가 원래 부산 아쿠아리움 자리에 있었다가 근처파출소 앞으로 옮겨지더니 지금은 화장실 옆으로 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 된 거처럼 사후에 이안눌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거창한 난감함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 모르겠다...
은평소방서 예방과 소방장 최선미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은평소방서 홍보담당입니다. 우리 은평소방서는 24시간 불철주야 시민의 안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소방대원들은 동분서주 은평구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 드리며 은평소방서의 소방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은평소방서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