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한국소방안전원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내기로 입사하면서 소방안전관리자를 일종의 ‘영웅’으로 여겼다.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는 존재, 위기의 순간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전문가. 법적으로 지정된 자리라면 당연히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법정 교육과정에 참여해 처음 마주한 현실은 그 생각과 많이 달랐다. 놀랐고 동시에 마음이 무거웠다.
소방안전관리자를 배치하도록 하는 제도는 1958년 3월 ‘소방법’ 제정과 함께 시작돼 60년이 넘는 역사가 있다. 오래된 제도는 그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제도는 마치 한 번 다져진 길처럼 계속해서 그 길을 따라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로 의존성은 처음에는 효율적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방안전관리자 제도 역시 그러한 길 위에 놓여 있는 듯 보였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40만개소의 건축물에 소방안전관리자가 선임돼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해당 건물에 상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법정 실무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상주해서 일하고 계신 분 손 들어보십시오”라고 물으면 30% 정도는 손을 든다. 하지만 뒤이어 “하루에 몇 시간 근무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비상 상황에서 직접 대처하신 경험이 있습니까?”라고 조금만 깊게 질문하면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는 실제 그들이 상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논설주간으로 등장한 백윤식의 언어를 빌려 앞 문장의 끝에 단어 3개만 바꾸겠다. “볼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집니다”로. 왜냐하면 많은 근무자가 불이익을 걱정하거나 무책임해 보일까 싶어 망설이며 손을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필자 역시 한국소방안전원에서 근무하면서 차츰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법정 실무교육 접수를 받던 중 80대 초반의 한 분이 1달 반 가까이 병원에 입원 중인데 왜 교육을 받으라고 겁박하느냐며 항의했다. 결국 교육을 받은 것으로 처리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이것이 현재의 실상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실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안전관리자가 현장에서 초동대응에 성공했다는 미담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소방안전관리자가 법적으로는 선임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장에 부재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만약 소방안전관리자가 건물에 상주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면 언론을 통해 한두 건쯤은 ‘소방안전관리자의 초기 대응으로 큰 피해 막아’ 같은 기사 제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용하고, 그래서 더 말이 많다. 의심이 간다면 직접 현장을 방문해보면 된다. 불시에 건물을 찾아가 보면 소방안전관리자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그 자리에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의 잘 보이는 곳에 이름표(소방안전관리자 현황표)만 걸려 있을 뿐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 분은 다른 지방에 거주하거나 다른 회사의 서류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소방안전관리자의 실질적인 역할은 점차 퇴화할 수밖에 없다. 자격 취득 당시에는 이론시험과 실무능력평가를 모두 통과해야 했지만 반복되지 않으면 숙련도는 당연히 떨어진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현장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됐을까?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는 자신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업은 100마일의 속도로 맞춰가고 가족은 60마일, 정부조직은 25마일, 법은 1마일의 속도로 따라간다’고 했다. 그만큼 현실은 제도보다 빠르게 변했지만 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인건비를 줄이려는 건물주의 요구, 겸직 허용이라는 편의적 운영, 나아가 현장 없는 선임 자체를 가능하게 한 법 제도의 틈.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상주하지 않는 영웅’을 만들어냈고 이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고착화됐다. 그 결과 건물에 불이 나도 누군가 현장에 있으며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계는 대부분 부재한다.
이 같은 실태를 고려할 때 이제는 소규모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소방안전관리자의 상주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안전관리자는 위기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주가 법적 의무가 되고 해당 역할이 하나의 전문직처럼 대우받을 때 비로소 소방안전관리자의 위상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새내기인 필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부족한 점도 많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꼈다. 위험은 늘 눈에 보이지 않게 다가오고 그 순간을 대비한 사람만이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그런 영웅이 건물마다 실제로 존재하길 바란다.
소방안전관리자의 역량이 퇴보하는 제도 앞에서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님보다 연세가 더 많은 분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눈빛으로 소방설비를 만지고 또 만지며 묻고 또 묻는 모습을 보면, 그래도 아직 희망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 모습이 참 좋았다. 그래서 펜을 들었다.
‘영웅’은 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닌 건물마다 실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국소방안전원 부산지부 이지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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